신앙과 신학에는 여러 가지 색깔이 있다. 사색적이고 철학적인 ‘보라색’이 있고, 열정적이고 배타적인 ‘붉은색’이 있고, 전통적이고 역사적인 ‘파란색’이 있다.
북 아프리카 알렉산드리아에서 형성된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사색적이고 철학적인 ‘보라’ 색깔의 신학을 주창했고, 로마에 뿌리를 두고 북아프리카 칼타고에서 형성된 라틴 학파는 열정적이고 배타적인 ‘붉은’ 색깔의 신학을 주창했으며, 예루살렘에 뿌리를 두고 수리아의 안디옥에서 형성된 안디옥 학파는 전통적이고 역사적인 ‘파란’ 색깔의 신학을 주창했다.
오늘은 북아프리카 칼타고에서 형성된 열정적이고 배타적인 ‘붉은’ 색깔의 신학의 내용과 특성을 살펴본다.
“철학은 이단의 어머니”
‘신앙과 이성과의 관계’에 대해서 다양한 입장들이 이천년 기독교 역사를 통해 나타났는데, 라틴 학파는 양자와의 관계를 ‘불연속적’이고 ‘상호 배타적’인 관계로 보았다.
라틴 학파의 터툴리안(150-220)은 그의 저술 「이단논박」에서 이성과 철학 일반에 대해서 부정적이고 배타적인 입장을 취했다.
「이단논박」7절에서 “철학은 이단에게 장비를 제공하고 있다.
예루살렘과 아덴이 무슨 상관이 있느냐?” (What has Jerusalem to do with Athens?) 고 외치며 철학을 비판했다.
터툴리안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믿음을 가진 후에는 탐구가 필요 없다고 단정했다.
같은 7절에서 “예수 그리스도 이후에는 사변이 필요 없으며 복음 이후에는 탐구가 필요 없다”고 주장했다.
기독교의 절대적이고 배타적인 신앙을 이교 세계를 향해서 분명하고 강하게 변증하기 위해서였다.
터툴리안은 신앙의 절대성과 배타성을 「이단논박」13절에서 다음과 같이 설파했다.
“신앙의 규칙(Rule of Faith) 즉 성부 성자 성령에 대한 하나의 신앙에 대해서는 어떠한 질문도 용납되지 않는다.
물론 신앙의 규칙이 방해 받지 않는 범위 안에서 토론은 할 수 있다.
그러나 결론을 말하면, 잘못된 것을 알게 되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차라리 ‘무식하게 있는 것이’(remain ignorant) 낫다.
예수님께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말씀했지(눅18:42) 네 성경 지식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라고 말씀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단논박」16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성경에 관한 토론은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하고 복통과 두통을 가져올 뿐이다.”
“Arguments about Scriptures achieve nothing but a stomach-ache or a headache.”
결국 터툴리안은 “모순되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 (I believe because it is absurd.) 라고 외치면서 신앙의 절대성과 역설성과 모순성을 강조했다.
“하나님의 아들이 탄생하셨다.
이와 같은 일은 부끄러운 일이기 때문에 나는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아들이 죽으셨다. 이것은 극히 어리석은 말이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
그리고 그는 장사 되었다가 다시 사시었다. 그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확실하다.” (“그리스도의 육신에 대하여” 5).
“세상이 기뻐할 때 우리는 차라리 슬퍼하자”
‘복음과 문화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다양한 입장들이 이천년 기독교 역사를 통해 나타났는데, 라틴 학파는 양자간의 관계를 ‘부정적’이고 ‘적대적’인 관계로 보았다.
터툴리안은 세상과 문화 일반에 대해서 부정적이고 적대적인 입장을 취했다.
터툴리안은 리차드 니버가 분류한 대로 ‘반 문화적 입장’(Christ against Culture)의 대변자라고 할 수 있다.
“터툴리안은 원죄가 사회 속에까지 스며들어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니버, “그리스도와 문화” p.52).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세속 질서에서 멀리 떠나야 하며 세속적 직업을 멀리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써커스, 극장, 경기장, 등에서 공연되는 게임이나 쇼에 참석하는 것을 단호히 배격했다.
“그와 같은 것들은 마귀에 의해서 만들어졌고, 마귀 때문에 만들어진, 악한 자에게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경기에 관하여” 24).
“조각, 회화, 문학, 수학, 체육, 첨성술, 연예, 교육, 정치, 병무 등의 세속적 직업을 일괄적으로 정죄했다. (“우상숭배에 관하여” 5,8-11, 18-19).
터툴리안은 재물을 악한 것으로 보며 돈을 사랑하는 부자는 천국에 갈 수 없다고 말했다.
여인들의 장식과 화장 등도 마귀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배격했으니, “피부를 약물로 문지르고, 뺨을 연지로 칠하고, 눈을 검댕으로 두드러지게 만드는 여인들은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이다”라고 지적했다.(“여인의 옷에 관하여” 5).
터툴리안의 입장이 좀 극단적인 것처럼 보인다.
기독교가 사고와 삶에 있어서 항상 세속화될 위험이 있기 때문에 이를 경계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한다.
터툴리안은 세속화와 우상숭배를 경계하면서 이렇게 글을 썼다.
“그리스도인들이 우상으로부터 교회로 온다.
원수의 작업장으로부터 하나님의 집으로 온다.
우상을 만들던 손을 하나님께 높이 든다.
마귀에게 내주었던 손으로 주님의 몸을 만진다.
우상 제조업자들이 성직자의 자리까지 차지한다.
이것은 탄식스러운 일이요 뿌끄러운 일이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손을 한번 그리스도에게 얹었지만 이들은 날마다 그의 몸을 괴롭힌다.
여러 종류의 수공업은 모두 우상을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책망을 받을 만한 일이다.” (“우상숭배에 관하여” 7,8).
그리스도인들이 이교적 축제에 참여하는 것도 옳지 않다고 했다.
“그와 같을 경우에 하나님의 종이 옷이나 음식이나 다른 방법으로 이교적 축제에 참여할 수 있는가?
사도가 ‘기뻐하는 자와 함께 기뻐하고 우는 자와 함께 울라’고 말한 것은 형제들에 관해서 말한 것이다.
즉 믿는 형제들과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 있어서는 빛과 어두움이 사귐이 있을 수 없고 생명과 죽음의 사귐이 있을 수 없다.
오히려 성경은 ‘세상이 기뻐할 때 너희는 슬퍼하라’고 했다.
우리가 세상과 함께 기뻐하면 세상과 함께 슬퍼하게 될까 봐 염려된다.
우리는 세상이 기뻐할 때 차라리 슬퍼하자. 그래야 세상이 슬퍼할 때 기뻐하게 될 것이다.
나사로가 아브라함 품에서 즐거워할 때 부자는 고통을 받게 되었다.
오늘날 많은 크리스천들이 세상이 하는 대로 하는 것이 괜찮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방인들과 함께 살도록 허용되었다.
그러나 그들과 함께 죽도록 허용되지는 않았다.
우리는 그들과 함께 세상에서 살지만 그들의 잘못을 함께 나눌 수는 없다.”
터툴리안의 입장이 좀 극단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밴틸 교수는 터툴리안을 가장 위대한 신학자로 지명하면서 우리는 그에게서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