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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을 읽어주었더니~


“야, 아무래도 너의 아빠 때문에 못살겠다. 그래 인스턴트식품 몇 개 샀다고 그렇게
며칠간을 들들 볶냐?”
“엄마가 잘못했어요. 잘 숨겼어야지요.”
딸아이가 충고하듯 말했다.
“뭐야? 너의 아빠는 10원이 비면 만원어치 잔소리하고, 만원이 비면 백만 원어치 잔
소리하는 거 모르니?”
엄마의 목소리는 더욱 커졌다.
“하기야 아빠가 좀 심하긴 하지요.”
그때서야 엄마가 마음이 풀리는지 이렇게 말했다.
“그렇지? 엄마 말이 맞지?”
엄마는 딸이 자기 말을 공감해주자 마치 어린아이와 같이 좋아했다. TV드라마를 시
청하던 중 어제 아침 딸과의 일이 생각났다.

요즘, 대학을 다니고 있는 딸이 방학이라 집에 내려와 새벽마다 영어회화 학원에 다
니고 있다. 차편이 좋지 않아 가끔 내가 역까지 태워다 주곤 한다.
어제 아침에도 새벽기도 후 딸을 데려다 주기 위해 마당에서 운동을 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되어도 나오지 않았다. 무슨 일인가 싶어 현관문을 바라보고 있는데
딸이 눈물을 훔치며 나오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야?”
“아빠, 엄마하고 싸웠어요.”
나는 침울해 있는 딸에게 “마음이 편치 않겠구나. 어떡하지?”하고 말없이 운전을
했다.
한참 후 딸이 말문을 열었다.
“엄마가 마음이 상해서 어떡하죠? 내가 말을 잘못해서……. 학원에 도착해서 엄마에
게 죄송하다고 전화해야지.”
그렇게 말하는 딸이 참 대견스러웠다. 아니 나 자신도 대견스러웠다. 딸의 마음을
풀어주는 대화를 했다는 점이.

나는 몇 년 전만 해도 가족들의 말과 감정을 받아주지 못했다. 아니, 수용해줘야 한
다는 것 자체를 몰랐다. 그러면서도 나는 내 의사소통방식이 가장 옳은 것으로 여겼다.
아침 일만 해도 그렇다. 예전 같았으면 딸에게 자초지종을 물으면서 왜 그런 일이 발
생하게 되었는지를 분석하면서 누가 잘못했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멋진(?)
훈계를 해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화법을 공부하고 또한 몇 년 간의 시행착오를 겪다보니 내가 사용하는 의사
소통 방식은 옳은 것이 아니었다.
이제 보니 그 일이 발생한 원인이 무엇이든, 잘잘못이 누구에게 있든 우선은 그 감정
그대로를 받아주는 것이 올바른 방식이었다.
허물 많은 남편, 부족한 아빠임에도 지금까지 별로 허물이 없는 사람처럼, 부족하지
않은 사람처럼 사랑과 이해로 대해준 아내와 두 자녀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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