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청년이 내게 휴대폰 화면을 슬며시 내밀며 물었다. “지난밤에 잠이 오지 않아서, 마음에 걸리던 본문 하나를 ChatGPT에 물어봤거든요. 답이 너무 깔끔해서 오히려 마음이 더 흔들렸어요. 이 답을,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 한 마디는 사실 이 시대의 한 영적 풍경 전체를 짧게 요약해 주는 질문이었다. 오늘날 신앙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의문이 들 때마다, 흔들릴 때마다, 위로가 필요할 때마다 가장 먼저 손을 뻗는 곳은 더는 교회의 문이 아니다. 그것은 휴대폰 화면 위의 작은 입력창이다.

오해는 없기를 바란다. 이 글은 AI에게 신앙 질문을 던지는 것이 곧 영적 타락이라는 식의 거친 결론을 향해 가지 않는다. 오히려 AI 시대의 신앙은, AI에게 던지는 질문 그 자체보다, 그 답을 받아드는 자세 안에서 결정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질문은 도구를 가리지 않는다. 그러나 답은 권위의 자리를 가린다. 우리가 마주해야 할 본질적 질문은 따라서 다음과 같다. AI가 내어 놓는 신앙적 답변은 어떤 권위의 자리에서 우리에게 닿는가, 그리고 우리는 그 권위의 자리를 어떻게 분별해야 하는가.
1. AI 답변의 구조 — 무엇이 거기 있고, 무엇이 거기 없는가
대형 언어모델이 신앙적 질문에 답하는 방식은 본질적으로 통계적이다. 모델은 인류가 남긴 방대한 신학 문헌, 설교, 주석, 영성 에세이, 신앙 상담 기록의 패턴을 학습했고, 사용자의 질문에 가장 그럴듯해 보이는 문장 배열을 산출한다. 이 자체는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AI는 평신도가 평생 가도 접할 수 없는 분량의 신학적 어휘를 짧은 시간 안에 정리해 보여 준다. 평범한 한 사람이 새벽 한 시에 ChatGPT에 “고통의 의미를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라고 물었을 때 받게 되는 답은, 종종 평일 저녁 소그룹 모임의 어떤 대답보다 훨씬 정리되어 있고, 어떤 신학 입문서의 한 단락보다 균형 잡혀 있다.
그러나 거기에 있는 것은 ‘정리된 언어’이지 ‘살아 있는 권위’가 아니다. AI의 답변에는 어떤 본문의 인용도, 어떤 신학자의 견해도 적절히 자리한다. 그러나 그 답변 뒤에는 한 가지 결정적인 것이 비어 있다. 그것은 ‘책임지는 인격’이다. AI는 자신이 내어 놓은 한 문장을 위해 밤새 무릎을 꿇어 본 적이 없다. AI는 자신이 권한 한 마디를 위해 누군가의 장례식 곁에 앉아 본 적이 없다. AI는 한 영혼의 흔들림 앞에서 자기 자신의 신앙 전부를 걸어 본 적이 없다. AI의 답변은 정리된 언어이지만, 정리된 언어는 그 자체로 영적 권위가 되지 않는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 디모데후서 3:16
2. 영적 권위가 머무는 자리
성경은 자신을 단순한 정보의 집합으로 소개하지 않는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고 자신을 가리킨다. 그 감동의 자리는 통계적 분포가 만들어내지 않는다. 그것은 한 인격이신 하나님의 영이 한 인격인 저자에게 닿아, 한 인격인 공동체에게 전해진 자리에서만 이루어진다. 영적 권위는 결국 ‘인격의 자리’다. 그것은 정보의 자리가 아니라 관계의 자리이며, 알고리즘의 자리가 아니라 영의 자리다.

이 자리를 회피하면 신앙은 빠르게 ‘신학적 정보 소비’로 환원된다. 우리는 더 많은 자료, 더 정리된 답변, 더 효율적인 요약을 추구하지만, 그 끝에서 우리는 종종 한 가지를 잃는다. 한 사람의 인격이 다른 한 사람의 인격에게 자신의 신앙 전부를 걸고 건네는 그 한 마디 — 그것이 사라진다. AI는 그 한 마디를 모방할 수는 있지만, 그 한 마디의 무게를 짊어질 수는 없다.
3. 분별의 자리 — 어떻게 받을 것인가
그렇다면 AI가 내어 놓는 답변을 어떻게 받을 것인가. 나는 세 가지 분별의 자세를 제안하고 싶다.
첫째, AI의 답변을 ‘신학적 사전’으로 받되, ‘신학적 권위’로 받지는 말자는 것이다. 정리된 어휘, 균형 잡힌 입장 요약, 다양한 견해의 지도는 AI가 잘 해 줄 수 있다. 그러나 그 지도 위에서 한 영혼이 어디에 서야 할지를 결정해 주는 손길은 다른 자리에서 와야 한다. 그것은 성경 본문 앞에서의 정직한 묵상, 공동체 안에서의 진지한 대화, 그리고 영적 분별이 훈련된 한 사람의 곁에 머무는 시간 안에서 형성된다.
둘째, AI의 답변을 받았을 때 가장 먼저 묻는 질문을 바꾸어 보자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이 답이 맞느냐”를 묻는다. 그러나 AI 시대의 더 본질적인 질문은 “이 답이 나에게 어떤 자리를 만들어 주느냐”이다. 그 답이 나를 성경 앞으로 다시 데리고 가는가, 아니면 성경을 우회하게 하는가. 그 답이 나를 한 공동체의 한 자리로 다시 보내는가, 아니면 공동체 없이도 충분하다는 착각을 강화하는가. 그 답이 나를 한 분 앞에 무릎 꿇게 하는가, 아니면 무릎의 자리를 휴대폰 화면이 대체하게 하는가.
셋째, AI에게 묻기 전에 ‘한 사람’에게 먼저 묻는 작은 훈련을 만들자는 것이다. AI의 답은 빠르고 정리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한 사람을 거치지 않고 곧장 화면으로 향한다. 그러나 한 사람을 거치는 시간은 단지 답을 얻는 시간이 아니다. 그것은 한 사람의 인격 안에 머무는 한 분의 임재를 함께 경험하는 시간이다. 어떤 답이든 한 사람을 거쳐 받았을 때 그 답은 비로소 한 인격의 무게를 입는다.

4. AI 시대의 신앙은 더 게을러지는가, 더 깊어지는가
도구는 늘 양면적이다. 그것은 우리를 게을러지게 만들 수도, 더 깊어지게 만들 수도 있다. 인쇄술이 그러했고, 라디오와 텔레비전이 그러했고, 인터넷이 그러했고, 이제 AI가 그러하다. 어떤 사람들에게 AI는 신앙적 사고를 외주화하는 통로가 될 것이다. 어떤 사람들에게 AI는 더 깊은 본문 앞으로 자신을 데려가는 도구가 될 것이다. 그 차이를 만드는 것은 도구 자체가 아니라, 도구를 다루는 한 사람의 영적 자세다.
새벽 한 시에 휴대폰 입력창에 한 줄을 입력한 그 청년에게 나는 짧게 답했다. “AI가 좋은 사전이 되어 주었네요. 그 사전 위에 한 분의 음성을 어디에서 들으실 건지, 그 자리를 함께 만들어 가요.” 그날 밤 그 청년은 휴대폰 화면을 닫고, 곁에 놓아 두었던 성경의 한 본문을 다시 펼쳤다. 그것이 AI 시대의 신앙이 갈 수 있는 한 가능한 길이라고, 나는 믿는다. AI의 답을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AI의 답이 끝나는 자리에서 한 분의 음성을 다시 듣기로 결심하는 자리.
이 시대의 영적 분별은, 결국 ‘권위의 자리’에 대한 분별이다. AI는 정보의 자리를 점점 더 넓게 차지할 것이다. 그러나 영적 권위의 자리는 오직 한 분께만 있다. 그리고 그 한 분의 권위는 여전히 성경의 본문과 한 인격인 성도의 곁에 머문다. AI 시대의 신앙은 그 사실을 더 자주 잊을 위험에 노출되어 있고, 동시에 그 사실을 더 또렷이 다시 발견할 기회도 함께 받고 있다. 어떤 길을 갈 것인가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선택이다.
오늘 밤에도 누군가는 휴대폰 화면 위에 한 줄의 신앙 질문을 입력할 것이다. 그 답이 화면 위에 정리되어 떠오르는 그 짧은 순간에, 우리가 한 가지만 더 기억할 수 있다면 좋겠다. 답은 화면 위에 있고, 권위는 다른 자리에 있다. 그 자리에 우리는 여전히, 그리고 더욱, 매일 한 번씩 자신을 다시 데려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