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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율이 출렁이는 봄, 가계부를 펼치며 — 금융인의 작은 묵상


지난 한 달 동안 환율은 선이 그어진 그래프처럼 단정하지 않았다. 그것은 출렁였다. 외환 데스크 너머에서, 그리고 평범한 직장인의 가계부 안쪽에서 동시에 출렁였다. 시장의 출렁임은 뉴스 한 줄로 끝나지만, 가계부의 출렁임은 한 가족의 식탁과 다음 달 학원비와 부모님께 보내는 작은 송금 안에 천천히 스며든다. 같은 출렁임이지만, 뉴스의 자리와 식탁의 자리는 다른 무게를 가진다.

금융을 직업으로 삼아 온 지 십수 년, 나는 늘 두 개의 자리를 동시에 살아왔다. 하나는 숫자가 결론을 내리는 자리고, 다른 하나는 숫자 너머의 사람을 기억해야 하는 자리다. 두 자리는 자주 충돌한다. 그리고 그 충돌의 한가운데에서, 신앙이라는 단어가 어떤 위치를 차지해야 하는지를 매번 다시 묻게 된다.

가난도 부유도 아닌 ‘필요한 양식’

잠언의 한 본문은 금융인의 일터에 가까이 둔다.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소서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 잠언 30:8

가계부를 펼쳐 둔 저녁 식탁의 단정한 풍경

이 본문이 신학적으로 무엇을 말하는지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지만, 한 사람의 재정 안내문으로 읽으면 의외로 명료하다. 가난은 사람을 비굴하게 만들고, 부유는 사람을 잊게 만든다. 둘 사이의 어느 지점에 ‘필요한 양식’이라는 모호하지만 절제된 표현이 있다. 그 표현이 모호한 것은, 사람마다 그 양이 다르고 시기마다 그 양이 변하기 때문일 것이다. 시장이 출렁이는 시기에 가계부를 펼치는 일은, 자기에게 필요한 양식의 윤곽을 다시 그려 보는 일과 닮아 있다.

변동성 앞에 선 사람의 자세

변동성을 직업으로 다루는 사람으로서 한 가지는 분명하다. 변동성은 제거되지 않는다. 분산투자, 리스크 관리, 헤지, 어떤 도구를 써도 변동성은 변형될 뿐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변동성 앞에 선 사람의 자세에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변동성에 휘둘리거나, 변동성과 함께 사는 법을 배우거나.

흥미롭게도 신앙의 언어 안에도 비슷한 발견이 있다. 인생의 변동성은 제거되지 않는다. 평탄한 길을 약속받은 사람은 성경 어디에도 없다. 다만 변동성 안에서 흔들리되 무너지지 않는 사람은 자주 등장한다. 시편의 시인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변동성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그 변동성 안에서 자기를 붙드는 어떤 손이 있다는 사실을 매번 다시 확인했다.

가계부 한 페이지의 정직성

재정 묵상이 머무는 책상 위 노트의 작은 자리

주말 저녁에 종이 가계부를 펼치는 습관은 의외로 오랜 영성 훈련이다. 디지털 자산관리 앱은 빠르고 깔끔하지만, 수기 가계부는 느리고 거칠다. 그러나 그 느림과 거침이 사람을 정직하게 만든다. 매번 같은 줄에 같은 항목을 적다 보면, 자기가 무엇에 가장 자주 돈을 쓰는지가 부정할 수 없는 형태로 드러난다. 시편 한 절보다 가계부 한 페이지가 더 정직할 때가 있다는 말은, 농담이 아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 마태복음 6:24

이 본문이 무서운 까닭은, 재물을 악으로 규정하기 때문이 아니다. 재물을 주인으로 모시는 자리에 우리가 자신도 모르게 자주 앉기 때문이다. 가계부를 펼치는 일은 그 자리에 누가 앉아 있는지를 한 달에 한 번씩 확인하는 일이다. 그 자리에 잠시 다른 손님이 앉아 있었다 해도, 다시 정중히 자리를 내어 달라고 청할 수 있다. 그것을 우리는 회개라고 부른다. 회개는 거창한 단어가 아니다. 한 항목씩, 한 페이지씩, 정직하게 다시 줄을 긋는 일이다.

금융인이라는 자리

가끔 사람들은 묻는다. 금융이라는 직업이 신앙과 어울리지 않는 것 아니냐고. 시장의 논리와 복음의 논리는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지 않느냐고. 한때는 그 질문 앞에서 변명에 가까운 답을 했지만, 이제는 다르게 답한다. 금융은 숫자를 다루는 일이지만, 결국은 사람의 시간을 다루는 일이다. 누군가의 노후, 누군가의 자녀 학자금, 누군가의 첫 주택, 누군가의 마지막 의료비. 모두 시간 위에 얹혀 있는 숫자들이다. 그 시간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 자세, 거기에 신앙이 들어설 자리가 있다.

변동성은 오늘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환율은 또 출렁일 것이고, 가계부는 또 한 줄씩 늘어날 것이다. 그 모든 출렁임 안에서 우리가 잃지 말아야 할 것은 단 하나의 자세다. 숫자보다 사람을 먼저 보는 자세, 결과보다 신실함을 먼저 묻는 자세, 그리고 풍요와 결핍의 어느 지점에서도 ‘필요한 양식’이라는 옛 기도를 잊지 않는 자세. 그 자세가 흔들리는 봄날 가계부 한 페이지에 적힌, 어쩌면 가장 작고 가장 단단한 묵상이다.

장기와 단기, 그리고 영원

금융의 언어 가운데 가장 자주 쓰이는 두 단어는 장기와 단기다. 장기 투자, 단기 매매, 장기 채권, 단기 유동성. 사람의 시간 감각은 자주 단기에 끌리지만, 신뢰를 만드는 시간은 거의 언제나 장기에 있다. 신앙도 다르지 않다. 단기적인 응답에 마음이 쏠리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지만, 신앙의 깊이는 장기의 시야 안에서 천천히 자란다. 단기와 장기, 그 둘 위에 한 번 더 얹히는 시야가 있다면, 그것은 영원이라는 이름의 시야일 것이다. 영원은 장기를 더 길게 늘인 단어가 아니라, 장기와는 다른 차원의 단어다. 영원의 시야가 들어오는 순간, 장기와 단기 모두 다른 의미를 띠게 된다. 가계부의 한 줄도, 분기 실적의 그래프도, 그리고 오늘 저녁의 식탁도.

돈을 말하는 일과 돈에 사로잡히는 일

한국 교회 안에서 돈에 관한 이야기가 자주 회피되어 온 까닭은, 돈을 말하는 일과 돈에 사로잡히는 일을 우리가 너무 가까이 놓아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 둘은 다르다. 돈을 정직하게 말하는 일은 돈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한 가장 좋은 훈련이다. 가려진 채로 두면 사로잡히기 쉽고, 드러내어 다루면 사로잡히기 어렵다. 가계부를 한 달에 한 번 펼치는 사람은, 그 단순한 행위 안에서 이미 작은 자유를 살아가고 있다. 자유는 거창한 단어가 아니라, 한 줄씩 정직하게 적는 작은 손에서 시작된다.

오늘 저녁의 가계부에 적는 한 줄

오늘 저녁 가계부에는 환율로 인한 작은 손실 하나가 적힐 것이다. 그 손실은 시장의 움직임 앞에서 누구도 피하지 못한 결과이고, 그 자체로 어떤 가르침을 담고 있는 사건은 아니다. 그러나 그 한 줄 옆에 나는 짧은 메모를 더해 두기로 했다. ‘필요한 양식’. 다섯 글자의 그 메모가 손실의 의미를 바꾸어 주지는 않지만, 손실 앞에 선 사람을 다른 자리에 세워 준다. 변동성에 휘둘리지 않고, 풍요에 잠기지 않으며, 결핍 앞에서도 비굴해지지 않는 자리. 그 자리에서 한 사람의 금융인은 오늘 저녁도 가계부를 덮고, 식탁의 불을 끄고, 잠자리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