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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나니 — 나눔이라는 역설의 경제학


돈에 관한 한, 세상의 논리는 명료합니다. 아끼고 모으고 지켜야 부유해진다는 것입니다. 이 상식은 대체로 옳습니다. 낭비를 삼가고 저축을 쌓는 절제는 분명 지혜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상식 위에 뜻밖의 한 문장을 얹습니다.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나누는데 오히려 풍족해진다니, 이것은 셈이 맞지 않는 말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신앙의 경제학은 바로 이 역설에서 시작됩니다.

재무의 세계에서 우리는 흔히 ‘제로섬’을 전제합니다. 한정된 파이를 두고 내가 더 가지면 남이 덜 가지고, 내가 내주면 그만큼 나는 줄어든다는 계산입니다. 이 사고 안에서 나눔은 손실입니다. 그러나 잠언의 기자는 전혀 다른 지평을 봅니다. 손을 펴서 흩는 사람이 오히려 윤택해지고, 지나치게 움켜쥐는 사람이 도리어 가난해진다는 것입니다. 이는 단순한 도덕적 권면이 아니라, 삶을 오래 관찰한 자의 냉정한 통찰입니다.

넓게 펼쳐진 초록빛 골짜기와 강

왜 그럴까요. 첫째, 나눔은 돈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을 자유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재물을 향한 집착은 은밀하게 사람을 옭아맵니다. 아무리 많이 쌓아도 ‘조금 더’라는 불안은 사라지지 않고, 가진 것을 잃을까 하는 두려움이 마음을 잠식합니다. 그러나 정기적으로 손을 펴 나누는 훈련을 하는 사람은, 돈이 자신의 주인이 아니라 도구임을 반복해서 확인합니다. 이 자유야말로 어떤 자산보다 값진 부요입니다.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지리라

— 잠언 11:24-25

둘째, 나눔은 관계라는 보이지 않는 자본을 쌓습니다. 현대 재무학조차 ‘사회적 자본’의 가치를 인정합니다. 신뢰와 호혜의 망 속에 있는 사람은 위기의 순간에 홀로 무너지지 않습니다. 오늘 누군가를 윤택하게 한 손길은, 훗날 내가 흔들릴 때 나를 붙드는 손이 되어 돌아옵니다. 물론 우리는 보답을 계산하며 주지 않습니다. 다만 나눔의 삶에는 계산을 넘어서는 방식으로 회복과 채움이 따라온다는 것을, 오래 신앙의 길을 걸은 이들은 압니다.

셋째, 무엇보다 나눔은 청지기의 본분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소유의 주인이 아니라 맡은 자, 곧 청지기라고 가르칩니다. 내 손안의 재물은 잠시 위탁된 것이며, 언젠가 셈을 드려야 할 대상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나눔은 손실이 아니라 위탁받은 자원을 본래의 목적대로 사용하는 일입니다. 주인의 뜻은 곳간을 무한히 채우는 것이 아니라, 그 곳간이 이웃의 굶주림 앞에서 열리는 것이었습니다.

산과 호수가 어우러진 평온한 풍경

그렇다고 성경이 무분별한 소비나 대책 없는 베풂을 권하는 것은 아닙니다. 같은 잠언은 개미의 부지런함과 저축의 지혜를 거듭 칭찬합니다. 참된 청지기 정신은 절제와 나눔이라는 두 날개로 납니다. 아끼는 지혜 없이 나누기만 하면 이내 바닥이 나고, 나누는 사랑 없이 모으기만 하면 마음이 굳어 버립니다. 건강한 재정은 저축과 기부, 소비와 투자가 균형을 이룬 자리에서 자랍니다. 균형을 잃은 극단은 어느 쪽이든 사람을 병들게 합니다.

실천의 차원에서 저는 이렇게 권합니다. 수입이 들어오면 가장 먼저 나눔의 몫을 떼어 놓으십시오. 쓰고 남은 것으로 나누려 하면 대개 나눌 것은 남지 않습니다. 순서를 바꾸어 ‘먼저 드리고 남은 것으로 사는’ 구조를 만들 때, 나눔은 우연이 아니라 삶의 원칙이 됩니다. 액수의 크기보다 중요한 것은 규칙성과 마음입니다. 적더라도 즐겨 내는 손을 하나님은 사랑하신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불확실성이 큰 시대일수록 사람들은 더 움켜쥐려 합니다. 경기가 흔들리고 미래가 불투명할 때, 지갑을 닫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런 때에 나눔의 역설은 더욱 빛을 발합니다. 두려움에 갇혀 모든 것을 자기 안으로 끌어당기는 삶은 풍요 속에서도 궁핍하지만, 신뢰 안에서 손을 펴는 삶은 결핍 속에서도 넉넉합니다. 재물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그것을 흐르게 하느냐 가두느냐가 부요의 진짜 척도입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창고에 갇힌 씨앗은 안전하지만 영원히 한 알에 머무릅니다. 흙에 흩뿌려진 씨앗만이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로 돌아옵니다. 나눔의 경제학이 가리키는 방향도 이와 같습니다. 움켜쥔 손안에서 재물은 늘어나지 않고 다만 낡아 가지만, 흩어 뿌린 손끝에서 재물은 사랑이 되고 생명이 되어 자라납니다. 이것이 세상의 셈법을 뒤집는 하늘의 산술입니다.

역사 속 신앙의 공동체들은 이 역설을 삶으로 증명해 왔습니다. 초대 교회는 있는 자가 없는 자와 나누어 ‘그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었다’고 기록됩니다. 흉년과 전염병의 시대에도 서로를 돌보던 그 나눔의 공동체는 오히려 더 단단해졌고, 세상은 그들을 보며 그 믿음의 실체를 궁금해했습니다. 나눔은 개인의 재정을 넘어 공동체 전체의 안전망이 됩니다. 혼자 쌓은 성벽보다, 서로에게 열린 곳간이 더 큰 위기를 견뎌 냅니다.

물론 나눔에도 지혜가 필요합니다. 감정에 휩쓸린 즉흥적 베풂보다, 꾸준하고 계획적인 나눔이 더 오래갑니다. 어디에, 얼마를, 어떻게 나눌지 미리 정해 두면 나눔은 부담이 아니라 기쁨이 됩니다. 또한 물질만이 나눔의 전부가 아닙니다. 시간과 재능, 지식과 관심 역시 흩어 뿌릴 수 있는 귀한 자원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흐르게 하는 사람은 이미 나눔의 부요를 누리는 사람입니다.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가장 값진 유산도 어쩌면 재산의 액수가 아니라 나눔의 태도일 것입니다. 부모가 손을 펴 나누는 모습을 보고 자란 아이는 돈을 우상이 아니라 도구로 대하는 법을 자연스레 배웁니다. 반대로 움켜쥐는 법만 배운 아이에게는 아무리 많은 유산도 결국 두려움의 씨앗이 됩니다. 재정 교육의 핵심은 계산법이 아니라, 재물을 흐르게 하는 마음의 방향을 물려주는 데 있습니다.

결국 나눔의 경제학이 우리에게 묻는 것은 하나입니다. 나는 재물의 주인으로 살 것인가, 청지기로 살 것인가. 주인은 잃을까 두려워 곳간을 걸어 잠그지만, 청지기는 맡은 것을 선한 목적에 흘려보내며 평안을 누립니다. 오늘 작은 나눔 하나를 시작해 보십시오. 그 손끝에서 시작된 흐름이 이웃을 적시고, 돌고 돌아 언젠가 당신의 삶까지 윤택하게 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오래전부터 약속한, 흩는 자의 부요입니다.

오늘 우리의 통장과 지갑을 잠시 들여다봅니다. 그 안의 숫자가 나를 지키는 성벽이 되어 있는지, 아니면 이웃에게로 흘러가는 물길이 되어 있는지 물어봅니다. 재정의 건강은 잔고의 크기가 아니라 흐름의 방향에서 드러납니다. 잘 흐르는 물이 썩지 않듯, 잘 나누는 재물이 참으로 우리를 부요하게 합니다. 그 부요는 통장에 다 기록되지 않지만, 삶의 가장 깊은 곳에서 우리를 든든히 지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