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네 시, 세상은 아직 깊은 잠 속에 있습니다. 거리의 불빛도 사위어 가고, 어제의 소음은 멀리 물러나 있습니다. 창밖은 검푸르고, 하늘과 땅의 경계는 아직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어둠 저편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깨어나고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빛은 늘 그렇게, 요란하지 않게 찾아옵니다. 문을 두드리지도, 이름을 부르지도 않으면서, 다만 어둠의 가장자리를 조금씩 옅게 만들며 다가옵니다.
이 시간에 깨어 본 사람은 압니다. 새벽은 단순히 밤과 낮 사이에 끼인 어중간한 시간이 아니라는 것을. 그것은 하루가 아직 아무 색도 입지 않은, 순결한 여백의 시간입니다. 아직 어떤 약속도 어기지 않았고, 어떤 말도 잘못 내뱉지 않았으며, 어떤 후회도 쌓이지 않은 시간. 하루 중 우리가 가장 정직해질 수 있는 시간이 바로 이 어슴푸레한 새벽인지도 모릅니다.
성경은 이 고요한 시간을 사랑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다윗은 쫓기는 광야의 밤에도, 동굴 깊은 곳에서도 새벽을 기다렸습니다. 그는 두려움에 잠 못 이루는 밤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어둠의 끝자락을 붙들고, 잠든 자기 영혼을 흔들어 깨우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 시편 57:8
새벽이 우리를 깨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새벽을 깨우겠다는 이 역설이 마음에 오래 머뭅니다. 보통 우리는 아침에 떠밀려 일어납니다. 알람이 울리고, 해야 할 일들이 등을 떠밀고, 어쩔 수 없이 하루가 시작됩니다. 그러나 다윗은 달랐습니다. 그는 하루에게 끌려가지 않고, 하루보다 먼저 일어나 하루를 맞이하려 했습니다. 가장 어두운 시간에 먼저 깨어, 아직 오지 않은 빛을 노래로 불러내려 했던 것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고백이 흘러나온 자리입니다. 시편 57편의 표제는 이 노래가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굴에 숨었을 때 지은 것이라고 일러 줍니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도피의 밤, 흙냄새 나는 동굴 바닥에서 그는 악기를 깨우고 새벽을 깨웠습니다. 환경이 평안해서 부른 노래가 아니라, 환경이 캄캄할수록 더 빛을 향해 몸을 돌린 사람의 노래였던 것입니다.

그 마음을 헤아려 봅니다. 새벽을 깨운다는 것은, 하루의 첫 숨을 누구에게 드릴 것인가를 정하는 일입니다. 눈을 뜨자마자 손에 쥐는 것이 휴대폰인지, 아니면 잠잠한 기도인지에 따라 그 하루의 결이 달라집니다. 첫 시간은 짧지만, 그 짧은 시간이 온종일의 방향을 가만히 결정합니다. 강물의 발원지가 작은 샘 하나이듯, 하루의 흐름도 그 첫 한 모금에서 비롯됩니다.
그렇다고 새벽이 거룩한 사람들만의 것은 아닙니다. 꼭 네 시에 일어나야 한다는 율법도 아닙니다. 다윗이 가르쳐 주는 것은 시계의 숫자가 아니라 마음의 순서입니다. 분주한 하루 가운데서도 가장 먼저 내어드리는 자리, 무엇으로도 채우지 않고 비워 두는 첫 자리 하나를 마음에 두는 일입니다. 그 자리가 있는 사람은, 종일 흔들려도 끝내 무너지지 않습니다. 닻을 내린 배가 파도에 흔들릴지언정 떠내려가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의 새벽이 늘 평온하지만은 않습니다. 어떤 새벽은 걱정의 무게에 짓눌려 먼저 깨어나고, 어떤 새벽은 풀리지 않는 문제를 안고 뒤척이다 맞이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런 새벽이야말로 다윗의 새벽과 가장 닮아 있습니다. 그는 평안을 다 얻은 뒤에 노래한 것이 아니라, 평안이 없는 한가운데서 노래를 먼저 선택했습니다. 마음이 정해진 사람은 흔들리는 상황 속에서도 찬양을 미루지 않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새벽을 기다리는 진짜 이유는, 그 시간에 비로소 들리는 음성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낮의 소란이 물러간 자리에는, 평소에 묻혀 있던 작은 목소리가 들립니다. 나를 향한 그분의 마음, 어제의 실수에도 변치 않는 사랑, 오늘을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자비. 예레미야 애가의 기자는 폐허가 된 도성 한가운데서도 이 자비가 아침마다 새롭다고 고백했습니다. 무너진 자리에서도 새 아침은 어김없이 찾아왔고, 그 아침은 늘 새로운 긍휼을 안고 왔습니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 예레미야애가 3:22-23
아침마다 새롭다는 말이 그렇게 위로가 될 수 없습니다. 어제 받은 자비로 오늘을 버티는 것이 아니라, 오늘 아침에는 오늘의 몫으로 다시 부어지는 새 자비가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광야의 만나가 날마다 새로 내렸듯, 그분의 긍휼도 묵혀 두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니 어제 다 써 버린 것 같은 마음으로 새벽을 맞아도 괜찮습니다. 빈손으로 나아가도, 그 손은 다시 채워질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아침, 무거운 몸을 일으키기 전에 잠시 멈추어 보면 좋겠습니다. 아직 다 밝지 않은 그 어슴푸레한 시간에, 마음 한구석으로 조용히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하루의 첫 숨을 당신께 드립니다, 라고. 거창한 기도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다만 가장 먼저 그분을 향하여 마음을 돌리는 것, 그것이 새벽을 깨우는 자의 모습입니다. 그 한 번의 돌이킴이, 종일토록 마음을 지켜 줄 것입니다.
빛은 서두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옵니다. 검푸르던 하늘은 어느새 잿빛이 되고, 곧 옅은 분홍으로 물들며, 마침내 환한 아침이 됩니다. 그 사이 우리가 한 일은 그저 깨어 기다린 것뿐입니다. 어쩌면 신앙이란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빛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빛이 오실 줄 믿고 먼저 깨어 노래하는 것. 오늘도 어김없이, 새 아침은 당신의 창에 도착해 있습니다. 그 빛 앞에서, 우리도 다윗처럼 잠든 영혼을 향해 나직이 속삭여 봅니다. 깰지어다, 내 영혼아. 오늘도 새벽을 깨우자.
옛 신앙의 선배들은 이 새벽 시간을 “하나님과의 밀회”라 불렀습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시간에,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그분과 단둘이 마주하는 시간이라는 뜻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드리는 기도에는 아무래도 보이려는 마음이 섞이기 쉽습니다. 그러나 새벽의 기도에는 관객이 없습니다. 오직 듣는 분과 아뢰는 자만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새벽 기도는 가장 꾸밈없는 기도, 가장 나다운 기도가 됩니다. 거기서 우리는 비로소 가면을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그분 앞에 앉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러하셨습니다. 복음서는 그분이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일어나 한적한 곳으로 나아가 기도하셨다고 전합니다. 하루 종일 병든 자를 고치고 무리를 가르치셨던 분, 누구보다 바쁘셨던 분이 가장 먼저 한 일이 바로 새벽의 기도였습니다. 일이 많을수록 기도를 줄인 것이 아니라, 일이 많을수록 더 먼저 깨어 아버지를 찾으셨습니다. 우리의 분주함은 종종 기도를 미루는 핑계가 되지만, 그분께는 분주함이 도리어 새벽을 깨우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맞이할 하루도 어떤 색으로 채워질지 알 수 없습니다. 기쁜 소식이 올 수도, 버거운 짐이 더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에 앞서, 우리에게는 먼저 깨어 그분을 향할 수 있는 여백의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그 시간을 어떻게 쓰느냐는 온전히 우리의 몫입니다. 새벽은 매일 우리를 찾아오지만, 그 새벽을 깨우는 것은 결국 우리 자신의 선택입니다. 오늘도 그 선택 앞에서, 잠든 영혼을 가만히 흔들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