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새벽, 성경을 펼쳤다. 마태복음 6장이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 중 한 부분,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이 말씀이 오늘따라 유난히 가슴에 꽂혔다. 아마도 어젯밤 늦게까지 이것저것 걱정하며 잠들었기 때문이리라. 미래에 대한 불안,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피로감. 그 모든 것을 들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새벽 말씀이 마치 하나님이 내게 직접 건네시는 편지처럼 느껴졌다. 이것이 성경의 힘이다. 수천 년 전에 기록된 말씀이 지금 이 순간 나의 상황에 정확히 말을 건다.

염려. 이것은 현대인의 병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휴대폰을 확인하고, 뉴스를 보고, 주가를 확인하고, SNS를 스크롤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걱정한다. 건강, 돈, 관계, 미래. 그리고 그 걱정들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쌓인다. 하루가 지나면 어제의 걱정 위에 오늘의 걱정이 더해지고, 일주일이 지나면 그 무게는 우리를 짓누른다. 예수님 당시 사람들도 그랬던 것 같다. 무엇을 먹을지, 무엇을 입을지, 기본적인 생존의 문제가 그들을 눌렀다. 갈릴리 어부들, 들판의 농부들, 예루살렘의 상인들. 그들의 삶도 오늘 우리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공중의 새를 보라.” 새들은 씨를 뿌리지도, 거두지도, 창고에 모으지도 않는다. 그러나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신다. 나는 이 말씀을 읽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마침 참새 한 마리가 창틀에 앉았다가 날아갔다. 그 작은 새가 씨를 걱정하며 우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아침에 먹이를 찾아 나서지만, 불안에 떨며 잠 못 이루는 것은 아니다. 창조주가 그들을 위해 먹을 것을 예비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너희는 이것들보다 훨씬 귀하지 아니하냐.”
그리고 “들의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으나, 솔로몬의 모든 영광도 이 꽃 하나만 못하다. 들판에 피어난 들꽃 하나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화려한 왕의 옷보다 아름답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이것은 단순한 자연 예찬이 아니다. 하나님이 창조의 세계에 얼마나 풍성한 아름다움과 공급을 심어 놓으셨는지를 보라는 초대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더 귀히 여기시는지를.

이 비유가 단순히 낙관적 사고를 가르치는 것이 아님을 나는 안다. 예수님은 현실을 모른 척하는 분이 아니시다. 그분은 우리 삶의 무게를 아신다.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현실, 아파서 의사를 찾아야 하는 현실. 그것들을 무시하고 “그냥 믿으면 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분은 또한 이것을 아신다. 우리의 염려가 한 치의 키도 더할 수 없다는 것을. 밤새 걱정해도 내일은 여전히 내일이 온다. 염려는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를 소진시킨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 마태복음 6:34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나는 깨달았다. 우리의 문제는 오늘의 걱정에 내일의 걱정까지 더해서 지고 다니는 데 있다. 과거의 후회와 미래의 불안이 오늘 이 순간을 압도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오늘 하루를 살라. 오늘의 하나님을 믿으라. 만나는 매일 아침 내려왔다. 이틀치를 거두면 상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오늘의 은혜로 오늘을 살기를 원하신다. 미래를 위해 은혜를 저장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새로운 은혜를 받는 것.
신앙의 본질은 이것이 아닐까.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을 하나님께 돌려드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오늘에 집중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라”는 말씀의 실천이다. 나는 한동안 이 말씀의 구하라는 명령이 단순히 기도하라는 뜻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묵상하다 보니 더 깊은 의미가 있다. 헬라어 원문에서 구하다는 단어는 현재 능동태 명령형이다. 지금 이 순간, 지속적으로, 능동적으로 구하라는 것이다. 한 번 기도하고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매순간 하나님께 향하는 삶의 자세.
빌립보서 4장에서 바울은 같은 주제를 다른 방식으로 말한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염려의 자리에 기도를 놓는 것이다. 염려가 찾아올 때마다 그것을 기도로 전환하는 것. 이것이 신앙인의 삶의 훈련이다.
오늘 QT를 마치며 기도한다. “주님, 오늘 제 마음을 누르는 염려들을 당신께 드립니다. 내일을 모르지만 당신은 아십니다. 오늘 이 하루, 당신의 손 안에 살겠습니다. 공중의 새도 기르시고 들의 꽃도 입히시는 하나님, 저를 더욱 돌보아 주실 것을 믿습니다. 제 눈을 염려에서 들어 당신을 바라보게 하소서.” 새가 창밖에서 운다. 그 새를 보며 나는 미소 짓는다. 하나님이 기르시는 새처럼, 나도 그분의 손 안에 있다. 오늘 하루도 그렇게 시작한다. 염려를 내려놓고, 신뢰를 집어 드는 그 작은 선택으로. 그것이 하루를 여는 가장 아름다운 예배다.
나는 한동안 이 말씀의 구하라는 명령이 단순히 기도하라는 뜻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묵상하다 보니 더 깊은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헬라어 원문에서 구하다는 단어는 현재 능동태 명령형이다. 지금 이 순간, 지속적으로, 능동적으로 구하라는 것이다. 한 번 기도하고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매순간 하나님께 향하는 삶의 자세. 그것이 염려를 이기는 방법이다. 염려는 우리의 시선이 문제를 향할 때 온다. 신뢰는 우리의 시선이 하나님을 향할 때 온다.
빌립보서 4장에서 바울은 같은 주제를 다른 방식으로 말한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바울이 이 편지를 쓴 것은 감옥에서였다. 사슬에 묶인 채로 기쁨을 말하고, 제한된 환경에서 평강을 증언했다. 그것이 진정한 평강이다. 상황이 좋아서 오는 평강이 아니라, 상황을 초월하는 평강.
오늘 이 새벽 QT 묵상을 마치며 결단한다. 오늘 찾아오는 염려들을 그냥 품고 있지 않겠다. 그것들이 마음을 두드릴 때마다, 그것을 기도로 바꾸겠다. 주님, 이 염려를 당신께 드립니다. 당신이 아시고, 당신이 돌보십니다. 이 짧은 기도가 하루를 바꿀 수 있다. 아니, 인생을 바꿀 수 있다. 염려에서 신뢰로, 두려움에서 평안으로 건너가는 다리가 바로 기도이기 때문이다. 그 다리를 오늘 건너가겠다. 한 발씩, 한 숨씩, 하나님을 향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