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六月)이 왔다. 달력을 넘기자마자 창밖으로 쏟아지는 빛이 달라졌다. 오월의 빛이 간질거리는 설렘 같은 것이었다면, 유월의 빛은 묵직하고도 따뜻하다. 마치 오래된 약속이 드디어 이루어지는 순간의 빛처럼.

나는 요즘 아침마다 창가에 잠시 앉는다. 별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그냥 빛을 보고 싶어서다. 이 계절의 햇살이 유리창을 통과해 마루 위에 그림을 그려놓는 시간, 나는 그 빛의 움직임을 바라보며 하루를 시작한다. 기도라고 하기에는 너무 소박하고, 그냥 멍하니 있다고 하기에는 너무 충만한 그 시간.
신앙이란 거창한 것이어야 한다고 오랫동안 생각했다. 뜨거운 간증, 극적인 회심, 눈물로 범벅이 된 기도회, 한여름 수련회에서 불타오르는 헌신. 그런 것들만이 진짜 신앙이라고 여겼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조용한 아침 창가의 이 시간이 늘 부족한 것처럼 느껴졌다. 이렇게 평온한 게 과연 믿음이 맞는가,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아니 더 정확히는 삶의 굴곡을 몇 번 지나고 나서, 나는 이 일상의 고요함이야말로 가장 깊은 신앙의 지층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거창한 감격이 아니어도 된다. 아침마다 빛을 보며 “오늘도 주님이 계시는구나”라고 조용히 고백하는 것, 그것으로 충분하다.
주님, 아침마다 주의 인자하심을 들려 주시고, 내가 주를 신뢰하오니 내가 행할 길을 알게 하소서.
— 시편 143편 8절
유월의 일상은 특별히 드라마틱하지 않다. 아이들의 학교 준비물을 챙기고, 출근길에 버스를 기다리고, 점심을 먹고, 저녁을 짓는다. 이 반복되는 일들이 어떤 날은 지루하고 어떤 날은 버겁다. 하지만 그 일상의 결마다 하나님이 숨어 계신다는 것을, 나는 요즘 더 자주 발견한다.
오늘 아침 버스를 기다리다가 옆에 선 할머니가 작은 화분을 들고 있었다. 손자 집에 가져다 준다는 베고니아. “이게 여름 내내 꽃을 피운데요.” 할머니의 얼굴이 그 꽃만큼이나 환했다. 나는 그 짧은 만남에서 이상하게 가슴이 뭉클했다. 꽃 하나를 들고 가는 할머니의 걸음 안에도, 계절의 정직한 흐름 안에도, 분명히 하나님의 손길이 있다.
일상을 순례로 만드는 것은 특별한 사건이 아니다. 시선의 문제다. 같은 길을 걷더라도 어떤 눈으로 걷느냐에 따라 그 길이 달라진다. 관광객의 눈으로 걷는 사람과 순례자의 눈으로 걷는 사람은, 같은 자갈 위를 걸으면서도 전혀 다른 것을 경험한다.

나는 요즘 의도적으로 느리게 걷는 연습을 한다. 특히 저녁에 동네를 한 바퀴 돌 때.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이어폰을 빼고, 그냥 걷는다. 처음에는 불편했다. 뭔가를 들어야 할 것 같고, 뭔가를 보아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익숙해지면서 점점 더 많은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담장 위의 고양이,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어디선가 풍겨오는 저녁밥 냄새. 그것들이 작은 은총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켈트 기독교 전통에는 ‘얇은 장소(thin places)’라는 개념이 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경계가 얇아져 서로 가까이 느껴지는 장소를 말한다. 아일랜드의 오래된 수도원이나 스코틀랜드 해안의 절벽 같은 곳들. 하지만 나는 그 얇은 장소가 꼭 특별한 지리적 위치일 필요가 없다는 것을 믿는다. 아침 창가도, 버스 정류장도, 저녁 산책길도, 마음을 열면 얇은 장소가 될 수 있다.
어릴 때 어머니는 늘 “하나님이 주신 하루”라고 하셨다.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그 말을 하셨다. 그 말이 어린 내게는 그냥 습관적인 표현처럼 들렸다. 어른이 된 지금, 그 말의 무게를 비로소 안다. 하루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지, 우리가 쟁취하는 것이 아니다. 아침에 눈을 뜨는 것도,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것도, 모두 선물이다.
성 어거스틴은 “우리 마음이 주님 안에서 쉬기까지는 안식이 없다”고 했다. 그 고백이 오랫동안 나를 따라다녔다. 무언가를 채우려는 끝없는 욕구, 더 나아지려는 불안한 열망, 남보다 앞서야 한다는 조급함 — 이 모든 것의 밑에는 ‘아직 쉬지 못한 마음’이 있었다. 하나님 안에서의 안식이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무엇을 하든 그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이다.
유월의 일상이 순례가 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훈련이 필요하다. 첫째는 감사의 훈련이다.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에 감사하는 법을 배우는 것. 오늘 마신 커피 한 잔, 창밖의 바람, 지하철에서 자리를 양보해준 낯선 사람 — 이것들을 선물로 알아보는 눈. 둘째는 현존의 훈련이다. 과거를 후회하거나 미래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충분히 머무는 것. 셋째는 연결의 훈련이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보는 것. 버스 기사, 편의점 직원, 복도에서 스치는 이웃 —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을 담고 있다.
신학자 브레넌 매닝은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사랑받고 있다”고 했다. 이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한참 멈추었다. 내가 느끼는 사랑의 크기보다 실제 하나님의 사랑이 훨씬 크다는 것. 우리가 그 사랑을 충분히 감지하지 못하는 것뿐이라는 것. 유월의 햇살은 어쩌면 그 사랑의 또 다른 언어일지도 모른다.
오늘도 평범한 하루가 펼쳐질 것이다. 해야 할 일이 있고, 만나야 할 사람이 있고, 처리해야 할 문제들이 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의 결에 유월의 햇살이 스며들어 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오늘도 준비하신 작은 은총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그것을 발견하는 것이 신앙이고, 그 발견에 감사하는 것이 기도이며, 그 감사를 살아내는 것이 예배다.
유월의 햇살이 오늘도 창문을 두드린다. 이 빛이 그냥 지나가는 자연 현상이 아니라 나를 향한 말 걸음이라는 것을 알기에, 나는 오늘도 창가에 잠시 앉는다. 아무 말 없이. 그냥 여기 있음으로. 그것이 나의 기도이고, 나의 신앙이고, 나의 유월이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의 오늘도 하나님의 선물이다. 평범하고 특별할 것 없는 이 유월의 하루, 그 안에 숨겨진 작은 은총들을 발견하는 눈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란다. 일상이 순례가 되는 것은 먼 훗날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서 이미 시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