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은 비가 내렸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에 눈을 떴을 때, 나는 한동안 그냥 누워서 그 소리를 들었다. 빗소리는 언제나 마음속 어딘가를 건드린다. 바쁘게 돌아가던 생각의 바퀴들이 잠시 멈추는 느낌. 일정도, 걱정도, 오늘 해야 할 일들의 목록도 잠시 뒤로 물러나고, 그냥 비 소리 하나가 방 안을 채웠다. 오늘은 어디선가 찾아온 고요함이 있었다. 그 고요함 속에서 성경을 폈다. 시편 131편이 눈에 들어왔다. 세 절밖에 되지 않는 짧은 시편이지만, 오늘 아침엔 그 세 절이 유독 깊게 와닿았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 시편 131편 1-2절
짧은 말씀 안에 너무 많은 것이 담겨 있어서, 나는 한 절을 읽고 멈추었다가, 다시 읽고, 또 멈추었다. 첫 번째 절은 세 가지를 내려놓는 고백이다. 마음의 교만, 눈의 오만, 그리고 감당하지 못할 일을 억지로 이루려는 애씀. 이것이 얼마나 익숙한 유혹인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무언가를 더 해야 한다는 압박, 더 크게 되어야 한다는 조급함, 내 힘으로 모든 것을 통제하고 싶은 욕심. 다윗은 왕이었다. 왕으로서 이 모든 것을 내려놓는다고 고백한다는 것이 얼마나 역설적인가. 우리도 각자의 자리에서 왕처럼 살려는 욕망이 있다. 내 삶의 모든 것을 내가 주관해야 한다는 생각. 그것을 내려놓는 것이 신앙의 출발점이라고 다윗은 노래한다.
나는 오늘도 여러 가지를 떠올렸다. 아직 해결되지 않은 일들, 앞으로 해야 할 것들, 마음에 걸리는 관계들. 그것들이 빗소리를 타고 슬쩍 고개를 내밀었다. 하지만 말씀이 그것들을 조용히 제자리로 돌려보냈다. 지금 네가 해결해야 할 것들이 아니라고. 지금은 그냥 여기 있어도 된다고. 기묘하게도 말씀이 그런 평안을 가져다줄 때가 있다. 뭔가가 해결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냥 하나님 앞에 있다는 사실 하나가 모든 것을 잠잠하게 만드는 순간들. 그 순간이 오늘 아침, 유월의 빗소리 속에서 찾아왔다.

두 번째 절이 오늘 특히 마음에 닿았다. 젖 뗀 아이와 젖 먹는 아이의 차이. 젖 먹는 아이는 배가 고플 때 어머니를 찾는다. 무언가가 필요하기 때문에 온다. 그러나 젖을 뗀 아이는 다르다. 배고픔 때문이 아니라, 그냥 어머니 품이 좋아서 거기 있는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아도, 그 자리 자체가 충분하다. 이것이 성숙한 신앙이라고 다윗은 말하는 것 같다. 하나님을 찾는 우리의 이유가 무엇인가. 기도 응답을 받기 위해서인가, 문제가 해결되길 원해서인가, 마음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서인가. 그것들이 나쁜 동기는 아니다. 그러나 더 깊은 자리로 가면, 이유 없이 그냥 하나님 앞에 있고 싶어지는 때가 온다. 단지 그분이 계시기 때문에, 그 품 안이 가장 안전하고 따뜻하기 때문에.
빗소리가 잠잠해졌다가 다시 세어졌다. 나는 노트를 펴고 몇 줄 적었다. 오늘은 아무것도 구하지 않으려 한다. 그냥 여기 있는 연습을 해보자. 사실 이런 연습이 낯설다. 우리는 신앙생활에서 늘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낀다. 말씀을 읽어야 하고, 기도해야 하고, 봉사해야 하고, 전도해야 하고. 이 모든 것이 소중하고 귀하지만, 때로는 그 해야 함의 무게가 우리를 지치게 한다. 신앙이 의무가 되어버릴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앉아 있지만 실제로는 그분과 멀어져 있는 아이러니가 생긴다. 시편 131편은 그 자리에서 잠깐 내려오라고 말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다. 아무것도 구하지 않아도 좋다. 그냥 젖 뗀 아이처럼 하나님 앞에 조용히 앉아 있으라.
이 말씀을 묵상하다 보니, 유월의 비가 나에게 주는 선물이 바로 이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 오는 날은 조금 느려지게 된다. 외출을 줄이고, 일을 줄이고, 그냥 소리를 듣는 날. 그 안에서 하나님도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다. 오늘은 그냥 여기 있어도 된다고. 내가 여기 있다고. 얼마나 따뜻한 허락인가. 바쁜 나에게, 늘 뭔가를 해야 하는 내게, 그냥 있어도 된다는 그 말씀이 오늘 아침 가장 은혜로운 말씀이었다.

우리는 흔히 고요함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으로 오해한다. 그러나 시편 131편이 말하는 고요함은 적극적인 내려놓음이다. 교만을 내려놓고, 오만을 내려놓고, 억지로 이루려는 마음을 내려놓는 것. 그것이 가능해질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품 안에 안길 수 있다. 젖 뗀 아이가 어머니 품에 자연스럽게 앉듯이. 이 내려놓음은 한 번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매일 아침 새로 내려놓아야 하는 연습이다. 오늘 내려놓았다고 내일도 저절로 고요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것은 연습이다. 그리고 그 연습의 자리가 바로 아침의 말씀 앞이다. 오늘 아침 빗소리가 그 자리를 열어주었다.
세 번째 절로 돌아왔다.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고요함이 끝이 아님을 보여준다. 고요함 안에서 우리는 기다리는 사람이 된다. 영원을 향한 기다림 안으로 들어서는 것. 이 기다림은 불안한 기다림이 아니라, 이미 와 계신 분을 믿으면서 하는 고요한 기다림이다. 젖 뗀 아이가 어머니 품에 안겨 있으면서도 그 품에 더 깊이 안기기를 원하듯, 우리도 하나님의 품 안에 있으면서도 더 온전히 그 품을 신뢰하는 방향으로 자라간다. 이것이 영적 여정의 방향이다.
빗소리가 여전히 창을 두드린다. 유월의 초여름, 오늘 아침 나의 영성 일기는 여기까지다. 창 밖에는 초록이 짙어지고 있다. 비를 맞은 나뭇잎들이 이 계절의 빛깔로 빛나고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가 오늘도 조용히 이어지고 있다. 내일 아침 다시 이 자리로 돌아와서, 또 한 번 젖 뗀 아이처럼 앉는 연습을 해볼 것이다. 고요함은 한 번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매일 아침 새로 배워가는 것이니까. 그 연습이 쌓여 언젠가는 나도 다윗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 앞에서 평온한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