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여섯 시, 커튼 사이로 파고든 유월의 햇살이 책상 한쪽 모퉁이를 환하게 물들일 때, 나는 어제부터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몇 가지 걱정을 손에 든 채 성경을 펼쳤다. 마태복음 6장이었다. 읽다 보면 자연스레 멈추게 되는 구절이 있다. 오늘도 26절 앞에서 그랬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 마태복음 6장 26절
세 번쯤 소리 내어 읽었다.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는다. 창고도 없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기르신다. 이 단순한 구도가 오늘 아침에는 유난히 선명하게 들어왔다.
사실 나는 요즘 몇 가지 일들에 마음을 지나치게 쓰고 있었다.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일,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 이런 것들이 눈을 뜨기도 전에 마음속으로 먼저 들어와 앉아 있었다. 걱정이 먼저 하루를 시작하고, 나는 그 뒤를 따라가는 식이었다. 그 상태에서 성경을 펼쳤으니, 말씀이 그냥 지나쳐지지 않았던 것이다.
예수님이 새를 예로 드신 데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새는 하루를 계획하지 않는다. 어제의 걱정을 내일로 이월하지 않는다. 오늘 먹을 것을 오늘 안에서 찾고, 저녁이 되면 둥지로 돌아온다. “그러니 새처럼 아무 준비도 하지 말고 살라는 것이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포인트는 준비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었다. 염려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준비와 염려는 다르다. 준비는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다. 염려는 내일 일어날지도 모를 최악의 상황을 오늘 미리 당기는 것이다. 새는 날마다 먹이를 찾는다. 그것은 준비다. 하지만 새는 내일 먹이가 없을까봐 어제부터 전전긍긍하지 않는다. 그것이 새와 나의 차이였고, 말씀이 오늘 아침 나에게 조용히 짚어준 지점이었다.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는 구절에서 다시 한번 걸음을 멈췄다. 귀하다는 것은 단순히 소중하다는 감정적 표현이 아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눈에 나라는 존재가 새 한 마리보다 더 큰 무게를 가지고 있다는 선언이다. 그 아버지가 새를 기르신다면, 나를 기르지 않으실 이유가 없다. 기르신다는 동사는 현재형이다. 과거에 기르셨다도, 미래에 기르실 것이다도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오늘 이 날, 기르신다.
그 사실이 마음에 닿자 어딘가에서 긴장이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어깨에 들어가 있던 힘, 이를 악물고 버티던 힘, 혼자서 어떻게든 해결해 보려 쥐어짜던 힘이 스르르 내려앉는 감각. 그것이 말씀이 마음에 내려앉는 경험이라는 것을 나는 오랜 묵상을 통해 조금씩 알아왔다.
데일리QT를 꾸준히 해 온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말씀이 지식으로 머무는 날과 말씀이 마음에 내려앉는 날은 다르다는 것을. 전자는 성경을 읽은 날이고, 후자는 성경을 들은 날이다. 오늘은 들은 날이었다. 하나님이 기르신다는 사실이 귀가 아니라 가슴으로 들어오는 그런 날이었다. 그런 날은 그다지 자주 오지 않는다. 그래서 더 귀하다.
마태복음 6장의 끝, 34절은 이렇게 맺는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오늘은 오늘의 분량만 살기로 했다. 걱정을 없애겠다는 선언이 아니다. 내일의 걱정을 오늘로 당기지 않겠다는, 오늘 내게 주어진 것들을 오늘 성실히 감당하겠다는 조용한 결심이었다. 그것으로 이 아침 묵상을 마쳤다.
묵상을 마치고 창 밖을 바라보았다. 유월의 아침 햇살이 나뭇가지 사이로 흘러내리고, 어딘가에서 새 한 마리 소리가 맑게 들려왔다. 나는 그 소리를 잠깐 듣다가 성경을 덮었다. 오늘도 기르시는 아버지를 신뢰하며, 이 하루를 시작했다. 걱정은 아직 손에 있었지만, 그 걱정의 무게가 어제와는 조금 달랐다. 그것으로 충분한 아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