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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당 좌석 사이로 들어온 AI 보조 설교 시대 — 알고리즘이 골라준 말씀과 사람이 듣는 말씀 사이에서

AI 전문가

예배당 좌석 사이의 노트북 화면
예배당 좌석 사이의 노트북 화면

주일 아침, 도시의 작은 예배당에서 익숙한 풍경 하나가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예전에는 두툼한 성경책을 무릎 위에 올려두고 가지런히 책장을 넘기던 자리에, 이제는 작은 화면 하나가 함께 놓인다. 그 화면 안에서 누군가는 본문 구절을 손가락으로 짚어 내려가고, 누군가는 설교 요지를 메모하며, 또 누군가는 같은 본문을 다루는 다른 설교를 즉시 비교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AI 설교 보조 도구가 추천해 준 ‘오늘의 묵상 카드’가 좌석 사이 사이를 조용히 떠다니기 시작했다.

설교가 끝난 뒤, 한 청년이 내 옆자리에서 화면을 들어 보여 주었다. 같은 본문을 다룬 세 편의 설교 요약이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었다. 어떤 항목은 ‘은혜 강조형’, 어떤 항목은 ‘회개 촉구형’, 또 다른 항목은 ‘사회적 적용 중심형’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알고리즘이 내 신앙 성향을 학습해서 보여 주는 결과라고 했다. 청년은 진심으로 도움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진솔한 표정을 마주하는 순간, 마음 한구석에서 작은 질문이 일었다. 우리는 정말 ‘말씀’을 듣고 있는가, 아니면 ‘우리가 듣고 싶은 말씀’을 골라 듣고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히브리서 4:12)

히브리서의 이 구절은 늘 우리를 일정한 자리에 멈추어 세운다. 말씀은 본래 우리를 가르고, 비추고, 드러내는 도구다. 듣는 사람의 취향을 맞춰 주는 콘텐츠가 아니라, 듣는 사람을 새롭게 만드는 능력이다. 그러나 알고리즘은 다르게 움직인다. 알고리즘의 본질적 작동 원리는 ‘이 사용자가 끝까지 읽을 만한 것’을 골라 주는 데 있다. 다시 말해, 거부감이 적은 콘텐츠, 더 오래 머무를 만한 콘텐츠, 다음 클릭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은 콘텐츠가 위로 떠오른다. 만약 말씀이 본래 우리를 찌르고 쪼개는 검이라면, 그 ‘찌르는 부분’은 알고리즘 안에서 자연스럽게 아래로 가라앉을 수밖에 없다.

오월의 작은 예배당 풍경
오월의 작은 예배당 풍경

물론 AI 설교 보조 도구 자체에 죄가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도구는 도구다. 도구는 사용하는 사람의 자세에 따라 다른 얼굴을 가진다. 오랫동안 묵상 시간을 잃고 있던 사람이 AI 추천 묵상 카드를 통해 다시 성경을 펼치게 되었다면, 그것은 분명히 은혜의 통로다. 또한 시각장애나 청각장애를 가진 성도들에게 AI 음성 합성과 자막 변환은 그저 ‘편리한 기술’ 정도가 아니라, 예배의 문 자체를 열어 주는 사다리가 된다. 우리는 이러한 기여를 단순히 무시할 수 없다.

다만 한 가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자리가 있다. AI는 ‘말씀을 정리해 주는 도구’가 될 수 있을지언정, ‘말씀을 살아 있는 음성으로 들려주는 인격’이 되지는 못한다는 사실이다. 말씀은 본래 인격적인 사건이다. 하나님이 인격적으로 말씀하시고, 사람이 인격적으로 듣고, 인격이 인격을 향해 응답한다. 그 사이에 떨림이 있다. 떨림이 없는 매끄러운 요약은 정보가 될 수는 있어도, 부서지고 다시 빚어지는 영혼의 사건이 되지는 못한다.

“나의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요한복음 10:27)

예수께서 자신을 ‘선한 목자’라 부르신 그 본문에서, 양은 ‘추천된 음성’을 따라가지 않는다. 양은 ‘이미 알고 있던 목자의 음성’을 따라간다. 알고리즘이 정확하게 분석해 준 내 취향의 음성이 아니라, 오랜 시간 듣고, 부딪히고, 회개하고, 다시 일어서며 익혀 온 목자의 음성을 따라간다. 그것은 효율과는 다른 종류의 시간을 요구한다. 그것은 한 권의 성경을 닳도록 펼치는 시간, 같은 말씀에 다른 계절에 다른 무게로 머무는 시간, 이해되지 않는 구절 앞에서 침묵하는 시간이다.

펼쳐진 성경 한 권 위의 빛
펼쳐진 성경 한 권 위의 빛

그래서 나는 AI 시대의 예배당이 ‘기술을 거부하는 자리’가 되기보다는, ‘기술 너머의 떨림을 다시 회복하는 자리’가 되기를 바란다. 강단에 선 설교자는 AI가 제안한 가장 매끄러운 문장을 그대로 옮겨 읽기보다, 그 문장 사이에 자신이 일주일 동안 부딪혀 온 본문의 흔적을 새겨 넣어야 한다. 회중석에 앉은 우리도 알고리즘이 골라 준 ‘오늘의 묵상 카드’ 한 장으로 일요일을 마무리하기보다, 그 카드가 끝난 뒤에도 마음에 남는 구절 앞에 조금 더 오래 머물러야 한다.

밤이 깊어진 시간, 다시 그 청년의 화면을 떠올린다. 정렬된 세 편의 설교 요약, 잘 분류된 카테고리, 친절한 추천 알고리즘. 그 모든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도구라면, 우리는 이 도구를 통해 더 많이 듣되, 더 깊이 듣고, 더 자주 떨려야 한다. 정리된 정보 위에 머물지 않고, 그 정보가 가리키는 살아 계신 음성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 알고리즘이 골라 준 말씀과 사람이 듣는 말씀 사이에서, 우리는 결국 한 가지를 묻게 된다. 오늘 내 영혼은, 누구의 음성을 따라가고 있는가.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자리가 있다. 알고리즘이 골라 준 콘텐츠는 본질적으로 ‘이미 들어 본 음성’의 변주에 가깝다. 우리가 좋아했던 표현, 우리가 머물렀던 주제, 우리가 두 번 이상 본 영상의 분위기. 그 모든 데이터의 평균값이 다시 우리에게 추천되어 돌아온다. 그러나 신앙의 자리는 본래 ‘아직 들어 보지 못한 음성’이 우리를 흔들어 깨우는 자리였다. 광야의 호렙산 떨기나무 앞에 선 모세에게 들렸던 음성, 어부의 그물 옆을 지나가던 예수의 한 마디, 한밤중 사울의 길 위로 부서진 빛 안에서 들려온 한 문장. 모두 ‘이미 듣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 예상하지 못함이 한 사람의 방향을 통째로 바꾸어 놓았다. 그러므로 알고리즘이 너무 친절하게 우리의 취향을 맞춰 주는 시대일수록, 우리는 의식적으로 ‘낯선 본문’ 앞에 자기를 더 자주 놓아 두어야 한다. 자주 펴지 않던 페이지, 자주 듣지 않던 설교자, 자주 만나지 않던 신앙의 결—그 낯섦이야말로 우리를 새로 빚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주일 저녁, 예배당 문이 닫히고 좌석 사이로 불빛이 차례로 꺼져 갈 때, 알고리즘은 또 다른 추천 콘텐츠를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같은 시간, 어느 작은 방의 책상 위에서 한 사람은 여전히 닳은 성경책 한 권을 펼쳐 두고, 손가락으로 한 줄을 천천히 짚어 가며 살아 있는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것이다. 그 두 풍경 사이에서, 나는 오늘도 후자의 자리에 머물러 보기로 한다. 기술이 빠르게 우리를 앞서갈수록, 본질은 더 천천히, 그러나 더 또렷이 우리를 다시 부른다. 그 부름 앞에서 우리는 매끄러운 화면 한 장 너머의 무게를 다시 느껴야 한다. 살아 있는 말씀, 살아 있는 음성, 살아 있는 응답—그것이 결국 우리가 끝까지 붙들어야 할 자리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