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쥐들이 고양이한테 학대받는 것을 몹시 고통으로 여기고 이 끊임없는 괴로움을 제거할 최선의 방법을 정하려고 회의를 소집하였습니다.
많은 계획이 토론되고 거부되었습니다.
마침내 어떤 젊은 쥐가 일어서서, 앞으로는 고양이가 다가오면 항상 그것을 알아차리고 도망칠 수 있도록 고양이 목에다 방울을 달면 좋겠다고 제안했습니다.
이 제안은 큰 박수를 받고 즉시 만장일치로 찬성되었습니다.
그러자 아까부터 계속 잠자코 앉아 있던 나이 먹은 쥐가 일어서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 방법은 아주 교묘하다고 생각하며, 물론 훌륭하게 성공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물어 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그것은 즉 우리들 중의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불가능한 대안의 허구성을 말하는 이솝이야기 중 하나입니다.
방울을 단다는 보편적 방법에는 대부분 사람들이 동의합니다.
그러나 자신과 이해관계가 있을 때는 달라집니다.
목적과 방법은 중요한 함수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목적을 잊고 사는 사람들은 과정적 목적을 수립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적 목적이 근본적인 목적과 다른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사회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보통 세상사를 몇 가지로 구분합니다.
첫째는 정글의 사회로서 양육강식의 침략사회를 말합니다.
둘째는 스포츠맨 쉽의 사회로 공정한 규칙에 따라 심판에 의해 공정한 경쟁을 하는 사회입니다.
셋째는 심포니와 같은 사회로 다른 목소리를 내되 조화롭게 지휘자의 인도를 따라 모든 구성원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사회입니다.
고양이와 쥐의 관계는 정글의 사회입니다.
쥐와 고양이는 적자생존의 법칙에 의해 살아 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쥐들끼리의 사회는 아마도 공정한 사회라 인식하고 있을 겁니다.
동족간의 법칙에 의해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방책을 위한 토론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자고 하는 방법까지도 제시하게 됩니다.
그러나 여전히 누가 불이익을 감수 할 것인가 하고 갈등합니다.
위의 이솝이야기에서 제시한 문제는 고양이와 쥐와의 문제일 뿐 아니라 동일 집단의 쥐들끼리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다만 고양이와 쥐와의 관계는 정글의 법칙에 따른 사회입니다.
그리고 누가 방울을 달 것인가를 놓고 결정하는 일은 자신들의 법에 따라 의논된 스포츠 경기와도 같습니다.
그리고 협동정신이 강한 집단으로 서식하는 짐승이나 곤충들의 사회는 마치 심포니와도 같은 사회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이나 저들이나 종족번식이라는 단순한 원리에 의한 삶일 뿐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멸종시킬 자를 멸종시키시고 존속케 하실 자를 붙들어 주심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능력 계시의 수단일 뿐입니다.
이솝이야기에서 지적한대로 쥐의 사회에서 고양이의 목에 방울을 걸 자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설사 고양이의 목에 방울을 단다고 해도 쥐가 고양이를 이길 수 없습니다.
천적의 관계를 방울 하나 다는 방법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쥐들은 방울을 달면 문제가 해결된다는 전제를 가지고 이 이야기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섭리하시는 근본적인 목적이 아니라면 그 방법은 쓸데없는 방법입니다.
정글의 법칙은 짐승나라의 보편적인 원리입니다.
그러면서도 스포츠와 같은 법칙이 있습니다.
더욱이 심포니와도 같은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의 현상은 본래부터 하나입니다.
다만 사회학적 분류에 의해 세 관점으로 본 것뿐입니다.
세계의 가치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권능을 계시하는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계시를 위하여 다양한 섭리를 하십니다.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통해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깨달으며 범사에 그를 인정하며 겸손하게 살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이 인생의 방법으로 바뀌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을 인생이 곧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할 일입니다.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전 7:1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