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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지 사랑 – C.S루이스


애정이 우리를 죽이지 않게 하시고 또 [애정]이 죽지도 않게 하소서 – 존 던

  1. 들어가는 말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만 드려야 할 무조건적 헌신을 인간적 사랑에 바쳐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랑은 신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악마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우리를 파멸시킬 것이며, 그 자신 또한 파멸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의 자리를 허용받은 인간적 사랑은 사랑 그 자체로 남아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선물의 사랑, 필요의 사랑
무엇보다 먼저, 필요의 사랑을 ‘사랑’이라고 부르지 않는다면 이는 영어를 포함한 대부분의 언어에 폭력을 가하는 일이 됩니다.

물론 언어라는 것이 오류가 절대로 없는 안내자는 아니지만, 그 모든 결함에도 불구하고 언어에는 다량으 축적된 통찰과 경험이 담겨 있습니다.

처음부터 언어를 무시하고 들어가는 사람은, 나중에 어떤 식으로든 반드시 언어의 보복을 받게 됩니다

-우리는 필요의 사랑을 ‘단지 이기심일 뿐’이라고 말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단지라는 말은 언제나 위험한 말입니다. 물론 필요의 사랑도, 우리의 다른 충동들처럼 이기적으로 탐닉될 수 있습니다.

포악하고 탐욕적인 애정 요구는 실로 끔찍합니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 어느 누구도, 평안을 얻고자 어머니의 품으로 달려가는 아이나 ‘교제를 위해’ 친구를 찾는 어른을 이기적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아이든 어른이든, 그런 행동을 덜 한다고 해서 이타적인 것도 아닙니다.

필요의 사랑을 느끼더라도 상황에 따라 짐짓 숨기거나 꾹 참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랑을 아예 느끼지도 못한다면 그런 사람은 무정한 이기주의자의 표상일 것입니다.

우리는 사실상 서로를 필요로 하는 존재이기에 필요의 사랑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다시 말해 혼자 사는 것이 좋다고 착각하는 것은 영적으로 나쁜 증상입니다.

음식을 꼭 필요로 하는 인간에게, 입맛이 없다는 것은 의학적으로 나쁜 증상이듯이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의 저자는 ‘최하층 없이는 최상층이 설수 없다’ 고 말합니다.

‘저는 거지가 아닙니다.

아무런 사심 없이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지요’라고 뻐기며 창조자 앞으로 나오는 피조물은 뻔뻔하고도 어리석은 존재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선물의 사랑에 가장 근접해 본 사람이라면, 다음 순간, 아니 바로 그 순간 성경에 나오는 세리처럼 가슴을 치며, 유일하며 참된 수여자께 자신의 곤궁을 아뢸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 어떤 의미에서 인간은 하나님과 가장 유사하지 않을 때 오히려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다가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어떤 피조물에게 혹은 그 피조물의 어떤 상태에 넣어 주신 유사성이란 이미 만들어져 있으며 붙박이로 고정된 그 무엇으로서의 가까움을 의미합니다.

유사하다는 측면에서 하나님과 가깝다는 사실만으로는 결코 더 이상 가까워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접근한다는 의미에서의 가까움이란, 말 그대로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사성이란 그저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 – 감사로, 혹은 감사 없이 받아 사용하거나 오용할 수 있는 -인 반면, 접근은 아무리 은혜로 시작되고 유지된다 해도 결국 우리가 행해야 하는 무엇입니다.

  1. 인간 이하 것에 대한 애호와 사랑
    필요의 사랑은 우리의 빈곤에 대해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식물의 사랑은 하나님을 섬기려 하고 하나님을 위해 기꺼이 고난도 감수하려 합니다.

그런데 감상의 사랑은 하나님께 ‘당신의 크신 영과에 대해 감사드립니다’라고 말합니다.

-즐거움에 두 가지 종류가 있다는 것은 오래전부터 알려진 사실입니다.

먼저 욕망이 생겨서 비로소 즐거움이 되는 것이 그 하나?

그런 앞선 욕망 없이 그 자체로서 이미 즐거움인 것이 나머지 하나입니다.

~ 대단히 큰 그 즐거움은, 말하자면 요청 없이 덤으로 받은 선물입니다.

~가령, 물을 기대했는데 커피나 맥주를 대접받았다면, 그때 여러분은 첫 번째 종류의 즐거움(갈증해소)과 두 번째 종류의 즐거움(맛있는 음료)을 동시에 얻게 됩니다.

그리고 중독은, 전에는 두 번째 종류의 즐거움이던 것을 첫 번째 것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습니다.

~ 필요의 즐거움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꼭 필요하며 바로 그 자연스러움이 그 이상의 과잉을 막아 주는 반면, 감상의 즐거움은 불필요한 것으로서 온갖 사치와 악덕으로 이어진다고들 합니다.

~ 필요의 즐거움을 느낄 때는 자기 자신에 대해 과거 시제의 표현을 써서 말하는 반면, 감상의 즐거움을 느낄 때는 그 대상에 대해 현재 시제의 표현을 써서 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가장 순수하고 필수적인 필요의 즐거움에도 다시 이런 특성이 있습니다.

그 즐거움은 일단 얻고 난 다음에는, 증오까지는 아니더라도 놀라울 정도로 급격히 또 완전히 ‘시들해집니다’ 잔디를 깎느라 목이 바짝 마른 사람에게 주방 수도꼭지와 물 컵은 실로 매혹적인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단 6초만 지나도 그것은 모든 매력을 잃고 맙니다

~ 감상의 즐거움은 매우 다릅니다. 이즐거움은 단순히 우리 감각이 만족되었다는 느낌뿐 아니라, 무언가 그런 감상을 받아 마땅한 대사아이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합니다.

-그러나 그런 외부의 원조 없이는, 필요가 사라진 뒤에도 여전히 필요의 사랑이 ‘시들해지지’ 않을 것이라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이것이 바로 다 자란 자식들이 자기를 홀대한다며 원망하는 어머니들의 한숨과, 필요가 가시자 관계를 끊어 버린 남자에 대한 정부들의 원망이 세상에 가득한 이유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필요의 사랑은 사정이 다른데 왜냐하면 그분에 대한 우리의 필요는 이 세상에서나 다른 어떤 세상에서도 결코 끝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사실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끝날 수 있고, 그러면 그에 따라 필요의 사랑도 끝나 버릴수 있습니다

  1. 애정
    애정은 우리의 삶에 살금살금 기어들어와 서서히 퍼집니다.

그러고는 수수하고 편한 옷들, 온갖 개인적인 것들과 더불어 삽니다.

부드러운 실내화, 낡은 옷가지, 오래된 농담, 부엌 바닥에서 졸고 있는 개의 꼬리를 밟는 일, 재봉틀 소리, 잔디밭에 뒹굴고 있는 도깨비 인형 따위와 말입니다.

-애정의 대상은 반드시 친숙한 것이어야 합니다 ~ 애정은 가장 수수한 사랑입니다.

애정은 전혀 으스대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사랑에 빠진’ 상태나 우정에 대해 뻐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애정은 겸손하여 슬쩍 숨기도 하고 수줍은 얼굴을 하기도 합니다 ~ 애정으로 맺어진 관계에서 상대방에 대한 칭찬은 대개 그 사람이 자리에 없을 때나 그의 사후에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그들을 특별하지 않은 사람으로 여깁니다.

이렇게 상대를 특별하지 않게 여기는 태도는 에로의 경우에는 모욕이 되겠지만, 애정의 경우에는 어느 정도 옳고 타당합니다.

이는 편안하고도 조용한 그 감정의 성격에 걸맞기 때문입니다.

만일 애정을 요란스럽고 빈번하게 표현한다면, 이는 애정이 아닐 것입니다.

애정을 공중 앞에서 표현하는 것은 마치 이사할 때 가구들을 바깥에 내놓는 것과 같습니다.
집안에 있을 때는 보기 좋았던 가구들도, 햇볕에 내놓으면 왠지 볼품없고 싸구려처럼 보이거나 우스꽝스러워 보입니다.

-우정과 애정은 서로 다릅니다

-흔히 우리는 친구나 연인을 어떤 탁월성 – 아름다움, 솔직함, 선한 마음씨, 위트, 지성 등 – 때문에 선택했다고 말합니다.

일리가 없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실상 우리는 어떤 특별한 위트나 아름다움이나 선을 좋아했던 것이고, 이는 다분히 개인적 취향의 문제입니다.

이것이 바로 친구들과 연인들이 서로 ‘잘 맞는다’고 느끼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애정이 가진 탁월성은 정말 심하게, 심지어는 코믹할 정도로 서로 맞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어우러지게 한다는 데 있습니다.

운명에 의해 하는 수 없이 가족이나 이웃으로 묶이지 않았다면 전혀 관계 맺지 않았을 그런 사람들까지 말입니다.

그들 사이에 애정이 자라날 경우 이제 그들의 눈은 열리기 시작합니다.

처음엔 그저 ‘정이 들어’ 좋아하게 되지만, 어느 순간 마침내 ‘그이 속에 있는 무언가’를 알아보기 시작합니다.

처음으로 어떤 사람에 대해, ‘그가 내 스타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으로 좋은 사람이야’라고 진심으로 말하게 되는 그때는 실로 해방의 순간입니다.

~ 그러나 실제로는 어떤 경계를 건넌 것입니다.

그 나름으로 라는 말은, 지금 자신의 취향을 넘어서고 있음을, 선이나 지성 들이 내 입맛에 맞게 요리되고 차려지지 않았더라도 그 자체로서 감상하기를 배우고 있음을 뜻합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성에 대해 정말로 높은 안목이 있는 사람은, 매일 부딪히는 다양한 사람들 모두에게서 자신이 높이 평가할 그 무언가를 발견해내는 사람입니다.

제 경험으로 볼 때, 이러한 취향과 안목을 생기게 해 주는 것이 바로 애정입니다.

애정은 본의 아니게 알고 지내게 된 사람들을 주목하고 참아 주고 그들을 향해 미소 짓고 좋아하게 합니다.

그들이 우리와 잘 맞느냐고요? 감사하게도,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다만 그들 자신 –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독특하고, 짐작했던 것 훨씬 이상으로 훌륭한- 일 뿐입니다

-에로스 사랑이나 우정은, 그런 사랑을 받으려면 자격까지는 아니더라도 매력을 갖추기 위해 무언가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애정은 마치 이미 준비되어서 자연히 주어지는 ‘붙박이로 되어 있는’, ‘이미 마련된’, ‘딸려 오는’ 어떤 것으로 인식될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애정의 수혜를 당연한 권리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이 애정을 베풀지 않으면, 그들을 ‘비정상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애정에 대한 이런 식의 억지는 진리를 왜곡한 것입니다

-오비디우스[사랑받고자 한다면 먼저 사랑스러운 자가 되어라]

-애정 관계란 편한 옷을 입을 수 있고 서로 편하게 대해도 결례가 되지 않는 관계입니다.

그러나 편한 옷을 입는 것과 똑같은 옷을 냄새가 날 때까지 입는 것은 별개입니다.

파티에 갈 때 입어야 할 적당한 옷이 있는 것처럼, 가정생활을 위해서도 나름으로 입어야 할 적당한 옷이 있습니다. 이처럼 사회 생활 예의와 구별되는 가정생활 예의란 것이 있습니다.

~ 애정은 공적인 예의와 비교될 수 없을 만치 더욱 섬세하고 민감하고 깊은 호의를 최선을 다해 베푸는 것입니다

사회생활에서는 어떤 의식을 지키는 것으로 족합니다.

그러나 가정에서는 그런 의식이 표현하는 실재 자체를 드러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가정은 실로 최악의 이기주의가 판치는 곳이 됩니다.

~ 적당한 때에 적당한 어조로, 무슨 말이든 할 수 있습니다.

애정이 더 깊어질수록, 그런 어조와 시점을 정확하게 이해합니다(모든 사랑에는 나름의 사랑의 기술이 있는 법입니다)

그러나 ‘무슨 말이라도’ 할 수 있는 자유 운운하는 가정 폭군들의 말은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변화는 애정의 적입니다

-주는 일의 진정한 목표는, 받는 사람이 더 이상 받을 필요가 없는 상태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 이 사랑은 포기를 위해 일해야 합니다.

자신이 불필요한 존재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합니다.

‘그들에겐 내가 더 이상 필요 없어’라고 말하게 되는 시간을 보답으로 여겨야 합니다

-애정은 상식과 공정한 주고받기와 ‘선량한’ 태도가 있을 때 비로소 행복을 낳는다는 사실 말입니다

  1. 우정
    하루의 고된 일과를 마치고 네댓 명이 함께 방에 모일때, 실내화를 신고 벽난로 불꽃을 향해 다리를 뻗은 채 마실 것을 팔꿈치에 놓아 두고 있을 때,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전 세계와 세계 너머에 있는 그 무엇이 우리 마음에 밝히 드러날 때, 삶에서 이 이상 좋은 선물은 없습니다.

과연 어느 누가 자격이 있어서 이런 선물을 받는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램은 만일 세 친구 중에서 A가 죽는다면 B는 단순히 A만 잃을 뿐 아니라, C안에 있던 A의 일부 까지 잃는 것이며, 또 C도 A만 잃을 뿐 아니라 B안에 있던 A의 일부까지 잃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사실, 남성들은 일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즐겼던 것입니다.

그들은 같은 기술, 같은 위험과 어려움, 같은 농담을 공유하고 있는 동료 전사들, 사냥꾼들과 함께 모이는 것을 굉장히 좋아했습니다

-같은 비밀스러운 길을 걷고 있음을 발견한 두 사람이 이성일 때, 그들 사이에 생겨나는 우정은 대단히 쉽게- 어쩌면 시작된지 30분만에도- 에로스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정말이지 서로의 육체에 대해 혐오감을 갖고 있거나, 둘 중 한 사람이나 두 사람 모두에게 이미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머지않아 거의 확실히 그렇게 됩니다.

또 반대로 연인간의 에로스 사랑이 우정으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 그 두 가지 사랑은 구별이 모호해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분명해집니다.
당신과 깊고 온전한 우정을 나누어 왔던 어떤 사람이 점차로, 혹은 갑자기 연인이 될 경우, 당신은 그 사람과 나누는 에로스를 결코 다른 누구와 공유하려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정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일에는 전혀 질투심을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나의 연인이 나의 친구들과 깊고 참된 우정을 자연스럽게 맺어 가는 모습을 볼 때, 에로스는 한층 더 풍요로워집니다.

-완벽한 우정의 표지는 곤경에 처할 때 도움을 주고받는다는 사실이 아니라, 도움을 주고받은 뒤에도 두 사람 사이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에로스에서는 벌거벗은 몸이 만나지만, 우정에서는 벌거벗은 인격이 만납니다

-친구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잇는 반면 연인은 서로를 마주보고 있다

-마음만 먹으면 토론과 사상의 세계에 들어갈 자격을 능히 갖출 수 잇는 똑똑한 여성들은, 자격이 없을 때는 결코 거기에 끼려 하거나 그 세계를 망쳐 놓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무른 중요한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혼성 파티에 가면 자연스럽게 방 한쪽에 모여 여자들끼리만의 이야기를 나눕니다.

남자들이 그러하듯, 그들 또한 자기네 대화에 남자들이 끼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어떻게든 이성을 붙잡고 늘어지는 이들은, 남성이든 여성이든 그중 제일 변변치 못한 이들입니다.

우리는 부디 서로를 놔 주도록 합시다.

그들은 우리를 엄청 우스꽝스러워합니다.

그리고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같은 일에 종사하지 않는 이성들이, 서로를 다만 애정과 에로스로만 만날수 있는-서로 친구는 될 수 없는-상황에서 상대편이 성을 우스꽝스럽게 느끼는 것은 건강한 일입니다.

사실 이는 언제나 건강한 일입니다. 이성을 제대로 감상하는 사라마이라면, 어린아이나 동물을 감상할 때도 그렇듯이 누구나 때로 상대가 우습다고 느끼기 마련입니다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 가운데 홀로 있을 때, 우리는 어떤 견해나 기준을 소심한 자세로 견지합니다.

~ 우리는 누구나 동급의 사람들,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에게 판단 받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들만이 진정으로 우리 생각을 이해하는 사람들이기에, 그들만이 우리가 충분히 인정하는 기준들로써 우리를 판단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받고 싶어 하는 것은 바로 그들의 칭찬이며 우리가 정말로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그들의 비난입니다.

-사람아, 너의 창조자를 기쁘게 해 드리고, 즐겁게 지내라, 세상에 대해선 심각할 것 하나 없으니

  1. 에로스
    위험의 씨앗이 숨어 있는 곳은 다름 아닌, 에로스의 그 숭고성입니다.

에로스는 마치 신처럼 말합니다.

완전히 헌신하고, 행복을 깡그리 무시하고, 이기심을 초월하는 것이 마치 영원한 세계로부터 오는 메시지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그 자체로는 하나님의 음성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에로스의 그러한 숭고성과 자기 초월성으로 선뿐 아니라 악을 향해서도 돌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행위는 다른 모든 행위가 그렇듯이 느낌보다 훨씬 더 명시적이고 명확한 척도에 의해 그 정당성 여부가 결정됩니다.

즉, 약속을 지키는 행위인지 깨뜨리는 행위인지, 정의인지 불의인지, 자비인지 이기심인지, 순종인지 불순종인지 등에 의 결정됩니다.

-대부분은 먼저 단순히 그 연인에 대해 – 그녀 전체에 대해 총체적으로 – 즐거워하고 몰두합니다.

이런 상태의 남자는 사실 성에 대해 생각할 여유가 없습니다.

그 여인 자체를 생각하느라 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그녀라는 사실이 그녀가 여자라는 사실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그는 갈망으로 가득하나 그 갈망은 성적 갈망이 아닙니다

-그러나 에로스는 한 남자로 하여금 단순히 여자가 아니라 특정한 여자를 원하게 만듭니다.
불가사의하지만 확실히 그는 그 여인 자체를 갈망하는 것이지, 그녀가 줄 쾌락을 갈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을 사랑하느냐고요? 내가 바로 당신인데요!

-신앙생활에 가장 큰 방해요소는 세세한 현실적 문제에 대한 염려입니다.

사소하고 시시하기 그지없는 것에 대한 염려 말입니다 ~ 결혼생활에 늘 따르는 큰 유혹은 육욕이 아니라 탐욕입니다.

-우리는 비너스를 너무 진지하게만 대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전적인 진지성은, 사실 인간성에 폭력을 가하는 일입니다.

세상의 모든 언어와 문학이 성에 대한 농담으로 가득한 것은 공연한 일이 아닙니다.

~ 비너스에 대한 경건하고 엄숙한 태도가 결국에는 기독교적 삶을 훨씬 더 위험에 빠뜨린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육체 속에서 어떤 절대적인 것을 발견하고자 해서는 안됩니다.

사라의 침실에서 놀이와 웃음을 추방해 보십시오. 그러면 그 자리에는 거짓된 여신이 들어오게 됩니다

-우리 몸이 삶에서 감당하는 기능 중 하나가 광대 역할이라는 점을 인정하기 전까지는, 우리는 아직 그것과 더불어 사는 법을 제대로 익히지 못한 셈입니다.

  1. 자비
    우리는 사랑했던 이들에게서 등을 돌려 어떤 낯선 존재에게 가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날, 결코 그 얼굴이 낯설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가 지상에서 만났던 모든 순수한 사랑의 경험 속에 이미 함께 계셨고, 그 경험을 만들어 내고 뒷받침해 주셨으며 그속에서 매순간 움직이셨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가깝고 친밀한 사람이라도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일을 방해할 때에는 가차 없이 그들을 거부하고 부적격 판정을 내려야 합니다.

분명 그것은 미움처럼 비춰질 것입니다.

그러나 동정심에 좌우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들의 눈물에 눈을 감아야 하고, 그들의 탄원에 귀를 닫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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