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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글둥글 호박처럼


박 집사님이 커다란 호박을 주었습니다.

말이 ‘커다란’이지 보통 호박의 두 배는 될까요?

마땅한 비닐봉지가 없어서 커다란 곡식 푸대에 담아 왔습니다.

익기는 또 어찌나 잘 익었는지 색깔은 누렇다 못해 붉으스름했습니다.

죽을 끓여 목장예배에서 나눠먹자고 갖고 온 것인데, 껍질을 벗기는 동안 손목이 뻐근해질 정도였습니다.

우리집에서 제일 큰 솥을 꺼내었으나 다 끓일 수가 없어서 좀 더 작은 솥 하나를 마저 꺼내어야 했습니다.

“세상에…. 거름을 얼마나 내었길래 이리도 잘 키우셨어요?”

“거름을 달리 냈간? 심었던 둑에 거름이 있나도 모르고 심었지.”

그러니까 땅, 거름, 햇빛, 물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하나님이 공급하시고 그 손길로 직접 키우신 특별한 호박인 셈입니다.

박 집사님이야 봄날에 모종을 그 자리에 옮겨 심은 것밖에 달리 하신 일이 없지만 하나님 아버지는 봄을 지나 여름ㆍ가을이 되도록, 박 집사님이 호박에 대해 까맣게 잊어버리고 다른 일 하는 사이에도, 둥글둥글 커다란 호박이 되도록 돌보시며 키우신 것입니다.

‘그나저나 이 많은 호박죽을 어찌 할꼬?’ 하였더니, 마침 사모님이 팔을 다쳐서 식사준비가 여의치 않게 되었습니다.

‘그래, 이 때를 위하여 이리도 크게 준비해 두셨는가보다’ 하고 사택에 한 솥을 드렸습니다.

초겨울 그믐밤, 사위(四圍)는 깜깜한데 사랑하는 집사님들과 옹기종기 둘러앉아 김 솔솔 나는 호박죽을 후후 불어가며 먹는 재미가 참 좋았습니다.

밥상에 오른 김치는 세 가지.

김 집사님이 가져오신 겉절이와 잘 익은 깍두기, 박 집사님이 가져오신 무청김치를 아삭아삭 맛있게 먹었습니다.

전에는 김치나 밑반찬, 가지가지 농사 지은 것들을 누군가 가져다 주면 인간적인 정으로 받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나도 무언가로 보답을 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집사님들이 무언가를 들고 오면, 그것이 인간적인 정 때문도 아니요, 생색을 내기 위함도 아니며 보답을 바라고 그러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식구에게 나눠 주면서 보답을 바라는 사람은 없습니다.

맛있는 것 있으면 함께 먹고, 좋은 것 생기면 식구들부터 퍼 주고 싶은 바로 그 마음처럼, 서로 사랑하고 섬기는 마음으로 이것저것 챙겨 오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마음을 알기에 아무렇게나 요리할 수 없어서, 나는 솥뚜껑을 붙잡고 귀한 재료를 망치지 않도록 맛있게 요리해 달라고 기도드리며 죽을 쑤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나눠먹는 호박죽 한 그릇은 하루의 피로를, 한 계절의 수고로움을 다 잊게 할 만큼 행복한 음식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어떻게 호박을 만드실 생각을 하셔서 우리를 이다지도 행복하게 하시는지, 새삼 호박이라는 식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다른 채소보다 호박은 기르고 따는 재미가 좋습니다. 우선 기르는 재미라면, 나처럼 게으른 사람에게는 제격입니다.

한 번 거름 내고 심어두면 달리 손을 봐주지 않아도 됩니다.

밭둑으로 퍼지든지, 넌출넌출 어린 나무를 타고 넘든지, 제 멋대로 퍼져 나가게 내버려 둔들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그리고 따먹는 재미로 치자면 어린 순이나 애호박 따는 재미도 쏠쏠하지만, 무엇보다도 잘 익은 누런 호박을 따는 재미가 오지고도 오집니다.

열매가 크기에 탐스럽기도 하지만, 생각지 않은 곳에 보란듯이 뒹굴고 있는 호박을 딸라치면 횡재한 느낌마저 듭니다.

올해 우리집도 호박 모종 몇 개를 심긴 하였습니다.

가을로 접어들 무렵 궁금하여서 대충 훑어보니 제대로 익은 것이라곤 중간 크기로 달랑 두 개 밖에 없었습니다.

집 뒤 감나무 아래에 심었는데, 거름이 신통치 않았거나 양지 바른 쪽에 심지 않아서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나마 둘 중에 하나가 추수 감사 예물로 드릴 만하게 모양도 동글동글 예쁘고 잘 익었다 싶어서 다행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우리집 옆에 있는 수원이네 밭에서 고구마를 캐던 날에 말 그대로 횡재를 하였습니다.

이전에 딴 호박 두 개와는 견줄 수 없을 정도로 큰 호박 예닐곱 개가 고구마 밭 둑에 나란히 줄을 서 있었습니다.

일꾼들이 고구마를 캐려고 줄기를 걷다가 우리집 호박을 발견하고선 친절하게 둑에 한 줄로 세워둔 것입니다.

여름내 호박 넝쿨이 죄다 고구마밭으로 뻗어나가서 고구마 잎사귀 사이에 자리를 잡고 커갔던 것입니다.

하나씩 안아서 집안으로 들여다 놓으니 둥글둥글한 그 모양처럼 제 마음에도 풍성함이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호박을 키우신 하나님의 마음도 느끼게 되었습니다.

생각지도 않은 때에 생각지도 않은 풍성한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의 마음 말입니다.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은혜만 계수하기 바쁜 나인데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필요한 때를 위하여 늘 모든 것을 미리 준비해 놓고 계신다는 것을 한 번 더 깨닫게 되었습니다.

올 겨울, 우리집에서는 호박죽 끓이는 냄새가 몇 번 더 담장을 넘어갈 것입니다.

사랑하는 집사님들과 함께 그 죽 한 그릇을 놓고 감사기도를 드리는 일도 잊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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