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13:13-15)
사랑은 거부하지 않는 것, 언제나 영접하는 것, 용납하는 것이다.
아무리 못난 제자들이라 할지라도 자기를 팔려고 하는 가룟유다를 제외 하곤(요13:10) 다 수용해 주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틀린 것과 부족한 것을 구분하여 부족한 사람들은 항상 수용을 해야 한다.
우리의 주와 스승이신 그리스도가 그 본을 보였기 때문이다.
사랑은 주는 것이 먼저가 아니다.
수용해 주는 것, 받아 주는 것이다. 여호수아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곳이니 네 발에 신을 벗어라’(수5:15) 하시면서 거룩한 약속의 땅으로 받아들여 주신 여호와는 더럽기가 한이 없고 무지가 두더지와 같은 우리를 그의 품으로 받으셨다.
그리고 그 처절하고 쓰리고 독한 저주의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다.
우리를 꼭 안고 그 참혹한 십자가의 형벌을 받으셨다.
기어이 우리를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옮겨 가셨다.
그리고 ‘내게로 와라 나를 따라 오너라 아무 것도 더 할 것 없다 이리 와서 발만 씻으면 된다’ 수용하시며 안아 주신다.
이것이 그 분의 사랑이시다.
우리가 받았고 늘 받고 있는 은혜이다.
베드로처럼 수용받기에 송구한 마음으로 온 몸을 다 씻어 달라고 하는 민망한 사람들에게도 ‘아니다 내가 이미 십자가의 대속으로 너희들을 다 깨끗이 목욕을 시켰다 나의 영접함에 참예만 해라 그리하면 너희는 깨끗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하시면서 받아 주신다.
물결이 천번 만번 오락가락 하듯 우리의 마음도 그 물결 못지않게 왔다 갔다 한다.
그러나 우리 주와 스승이신 그리스도는 천만번이나 더 오락가락하는 우리의 마음보다 딱 한 번 더 수용해 주신다.
‘끝까지 사랑’하시겠다는 그의 맹세이시다.
아브라함에 짐승을 잡아 반을 갈라 맹세의 언약을 맺자고 하시고는 아브라함을 잠재우고 혼자 지나가신 그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매달아 피 흘려 죽게 하셨다.
그 언약을 혼자 이루시겠다는 뜻이다.
우리가 잘 났든 못났든 상관이 없다는 말이다.
우리가 그 분을 믿든 안 믿든 개의치 않겠다는 뜻이다.
천 번을 배신하든 만 번을 버리든 실망치 않겠다는 말씀이다.
끝까지 사랑하시기 위해 영원히 수용하시겠다는 의도이다.
나는 다음의 대통령은 좌우의 이념이나 동서의 갈등이나 남북의 격차를 두루 수용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부자도 수용하고 가난 한 자도 수용할 수 있는 사람, 기업도 수용하고 노동자도 수용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닭이 뒷발로 흙을 파헤치듯 헐뜯는 사람이 아니라 암탉이 새끼를 모으듯이 온 국민을 포근히 감싸 안을 수 있는 넉넉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으련만… 거부당한 적이 많은 사람은 다른 사람을 수용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용납을 많이 받아 본 사람은 그의 긍휼을 안다.
어떠한 나를 그 분이 받아주시고 또 받아 주셨는지 알기에 자신도 다른 사람을 수용하고 용납한다.
이런 사람이 바로 주의 종들이며 그의 제자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