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절)
성령의 계시가 없는 상태에서 예수님의 육신의 권세와 능력만 의지하고 따라온 제자들이 가진 황당함은 우리가 쉽게 느낄 수 있다. 어딜 가신다고 한다. 거기 가서 처소를 예비하면 데리러 오신단다. 그런데 그 곳과 길을 물어봐도 도무지 알 수 없는 비밀암호와 같은 말씀을 하신다. 자신을 보면 하나님을 알고, 또 자신이 하나님께 가는 길이란다. 거기다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보혜사 진리의 성령을 보내신단다. 그 때는 함께 계시겠단다. 메시야는 언제나 그의 백성들과 늘 함께 하시고 떠나지 않는다(요12:34)
그럼에도 ‘나는 간다 그러나 다신 온다. 나를 사랑한다면 이 약속을 지켜라 그리하면 아버지와 나의 사랑을 받고 우리가 너희에게 거처가 되어 주겠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다. 로마의 압제에서 구해 줄 정치적인 메시야 때로는 빵 문제나 병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경제적이며 복지의 메시야를 원했던 그들로서는 매우 염려스럽고 두렵다. 지금은 어떨까? 율법이 있기 전이나 율법이 있을 때나 구원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인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는다. 예수가 육신으로 이 땅에 계실 때나 성령이 계실 때나 그리스도를 실상으로 보고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비밀이다. 지금도 성령을 모르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이 땅에서 하신 일만 믿고 따르다가는 십자가 앞에서 길이 막혀 답답한 마음으로 서 있을 것이다. 성령이 가르치시고 생각나게 하심을 따라 종합적인 그리스도의 말씀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 분을 보내신 하나님의 전체의 의도를 파악하고, 그 분의 오심 그리고 십자가를 죽으심과 건너가심 그리고 승천과 성령의 임재와 우리 안에서 그 분의 영과 생명이 계심과 일하심의 사실을 그대로 믿고 시인해야 한다. 객관적인 성경지식이 성령에 의해 주관적인 체험의 지식을 바뀌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이 갈팡질팡하는 염려와 두려움을 이길 수 없다. 그러나 그 분이 지상에서 일하신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일을 통해서 그리스도로서 하늘에서는 하나님의 우편에 계신자로서 성령 안에서 그의 영과 생명이 우리 안에 임하여 세상 끝 날까지 임마누엘 하심을 믿는 사람에게는 평안이 온다. 하나님의 안전지대 안에서 보호받는다. 안전해 지고자 하는 것은 기본 욕구이다. 그러나 세상의 방법대로 몸만 화려한 문명의 숲 속에 숨는다고 참 평안을 누리는 것이 아니다. 영혼이 진리의 성령의 도움을 받아 그리스도가 의식주가 될 때에 비로소 참 평안을 얻는다. 이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