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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라는 단어의 신학 지식 — 에클레시아부터 오늘까지


“교회”라는 단어의 신학 지식 — 에클레시아부터 오늘까지

주일 아침,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교회에 간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단어가 담고 있는 신학적 무게를 다시 들여다보면 놀랄 만큼 깊은 이해가 열려 있습니다. 신약 성경이 사용하는 에클레시아라는 헬라어 단어는 원래 정치적·시민적 배경에서 “부름 받아 모인 자들”이라는 뜻을 가진 일상어였습니다. 폴리스 안에서 시민이 광장으로 부름 받아 모여 공적인 일을 결정하는 자리를 가리켰습니다.

사도들이 이 세속의 단어를 신앙 공동체를 가리키는 이름으로 채택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의 선언이었습니다. 교회는 사적인 종교 클럽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모인 공적 공동체라는 뜻입니다. 이 초대 신앙의 자기 이해를 잃을 때 교회는 종종 사적 취향의 집단으로 왜곡됩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 마태복음 16:18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

종교개혁 신학자들, 특히 아우구스티누스에서 칼뱅에 이르는 흐름은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라는 구분을 통해 교회의 이중적 실재를 설명했습니다. 보이는 교회는 우리가 주일에 모이는 지역 교회, 그 안의 회원들, 예배·성례·권징의 실제 실행을 가리킵니다. 보이지 않는 교회는 세상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그리스도께 속한 참된 신자들 전체를 가리키며, 오직 하나님만이 그 명부를 완전히 아십니다.

이 구분이 왜 중요할까요. 그것은 지역 교회의 한계를 이해하면서도 교회의 본질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어떤 지역 교회는 상처와 실망을 남깁니다. 어떤 지역 교회 안에는 진정한 신앙이 없는 사람도 있고, 어떤 지역 교회 바깥에도 그리스도께 진심으로 속한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이 “그러니 교회는 필요 없다”는 결론으로 가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백성을 지역 교회라는 구체적 자리로 부르시고 그 자리에서 성례와 말씀과 권징으로 양육하시기 때문입니다.

빛이 들어오는 스테인드글라스

교회의 네 표지

초대 교회는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에서 교회의 네 가지 표지를 고백했습니다. 하나, 거룩, 보편, 사도적입니다. 이 네 단어는 서로를 보충합니다.

“하나”는 교회의 통일성입니다. 지역과 시대와 언어가 달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라는 고백입니다. “거룩”은 도덕적 완전함이 아니라 세상에서 하나님을 위해 구별되었다는 신분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교회는 여전히 죄인들의 공동체이지만, 그 죄인들이 성령의 은혜로 성화의 과정을 지나가는 자리입니다.

“보편”은 라틴어 catholica의 번역으로, 지역과 문화를 초월하는 교회의 넓이를 가리킵니다. 어느 특정 민족이나 계층만의 교회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사도적”은 사도들이 전한 신앙과의 연속성입니다. 이것은 사도적 계승이라는 제도적 문제를 넘어, 우리가 여전히 사도들이 증언한 그 복음 안에 서 있는가라는 근본적 질문입니다.

고요한 예배당 내부

교회에 대한 오늘의 오해들

오늘 한국 사회에서 “교회”라는 단어는 여러 가지 상처와 오해를 안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에게 교회는 실망의 대명사이고, 어떤 이들에게는 개인적 위로의 소비 공간이며, 또 어떤 이들에게는 특정 정치·문화 진영과 동일시되는 이름입니다. 이 모든 이해는 신약 성경이 말하는 교회의 본질을 놓치고 있습니다.

교회는 실망을 남길 수 있는 실재이지만, 그 실망이 곧 교회의 부정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실망은 교회의 완전함에 대한 우리의 무의식적 기대의 실패이며, 성경은 처음부터 교회가 죄인들의 공동체임을 감추지 않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교회를 향해 “하나님의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라고 부릅니다. 완전해서가 아니라 부르심 받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교회는 개인 위로의 소비 공간이 아니라, 서로를 세우고 세상을 향해 살아가는 공동체입니다. 히브리서 10장 24절은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라고 권면합니다. 교회는 나를 위한 서비스 기관이 아니라, 내가 그 안에서 다른 이들을 위해 살아가는 자리입니다.

교회를 다시 사랑하는 이유

이 모든 신학적 이해가 결국 우리에게 남기는 것은 하나입니다. 교회는 우리의 취향과 편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으로 삼으신 실재입니다. 이 사실이 우리를 교회 앞에 다시 겸손하게 만듭니다. 나의 교회에는 결함이 있지만, 그 결함 위에서도 그리스도는 여전히 자신의 몸을 세워 가십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소비자의 태도가 아니라 지체의 태도여야 합니다. 필요할 때만 참여하는 회원이 아니라, 이 몸의 한 부분으로 살아가는 존재. 오래된 신학적 지식이 우리에게 새로운 실천의 자리를 열어주는 순간입니다.


본 글은 크로스맵 편집팀이 AI 도움을 받아 편집·발행합니다. 성경 인용은 개역개정판을 따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