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ck

싸움 중 가장 힘든 싸움은?


싸움 중에서 가장 힘든 싸움은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자신을 다스리고 자신을 통제하는 힘이 있다면 그는 요사이며 가장 강한 사람일 겁니다.

오늘 말씀의 배경은 예수께서 십자가를 앞에 놓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고난 당하실 것을 말씀하실 때 베드로는 그럴 수 없다고 붙잡았습니다. 예수를 사랑하기 때문에 고난의 길만은 막고 싶은 것이 스승에 대한 제자의 마음이며 예절일 것입니다. 그런 충정어린 베드로의 말에 예수님의 반응은 의외였습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16:23).

단호하게 질책하시는 주님은 베드로를 향하여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명하셨습니다. 그것은 사단이 베드로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도록 역사하였기 때문입니다. 왜 베드로가 그런 하늘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끔직한 말을 들어야 합니까?

주님께 착하다는 말을 듣고 충성된 종이라는 말을 들어도 부족할 텐데 사탄이라니, 그 말을 들었을 때 베드로의 심정을 상상해 보십시오.

사탄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못하게 하고, 오직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게 만드는 악한 영입니다. 악한 영이란 세상이 좋아하는 것을 좇도록 유혹하는 영입니다. 주의 일보다 세상 일을 더 크게 보도록 만드는 영입니다. 그러면 베드로처럼 책망 받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사단의 감동을 받고 사단이 넣어주는 생각을 따라서 말하며, 사단이 감동시킨 생각을 따라 주님의 일을 방해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고난당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입니다. 사람들은 고난을 싫어합니다, 따라서 고난을 피하려고만 합니다. 그리고 고난을 잃는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무엇인가를 빼앗기는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렇지만 예수께서는 생명을 잃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고난의 역설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16:24,25).

믿음이란 자기를 버리는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의 약한 부분이 자신을 깨트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버리지 못합니다. 왜 그렇게 사람들은 자신의 성을 쌓으며 자기를 드러내려고 합니까? 교만 때문입니다. 우월의식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다른 사람 밑에 서려고 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밟고라도 올라서야 만족을 누립니다. 자신이 지는 쪽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머리가 되고 싶어하지 꼬리를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종의 역할을 하는 사람보다 주인 행세를 원합니다. 왕이 되고 싶어하지 하인 되는 것을 싫어합니다. 높은 자리에 앉고 싶어하지 낮고 천한 자리는 피합니다. 그러니 누가 고난을 좋아하고 십자가를 지는 것을 기뻐하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비우는 모습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오르십니다. 왕의 자리를 포기하고 높아지는 자리를 버리고 종이 되시기 위해 그 곳을 향합니다. 바울은 예수에 대해 말하길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빌2:7)고백했습니다.

오늘은 이렇게 기도해보십시오. ‘하나님! 저는 이 시간 나 자신을 비우기를 원합니다. 도와주시옵소서.’ 이것이 부흥입니다. 너무 욕심을 내지 마십시오. 너무 경쟁하지 마십시오. 너무 비교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종의 형체를 가지십시오. 이렇게 사는 성도가 올바른 성도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있고 욕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삶의 모습은 다릅니다. 여러분이 예수를 닮기 원한다면 예수께서 가신 길을 가야하고 예수께서 사신 방법대로 살아야 예수의 향취가 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1:5에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라는 말씀만을 보면 예수께서 너무 초라한 외모라고 실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무엇을 보여주시기 원하시는지 깊이 있게 보면 너무 큰 은혜가 됩니다. 자기를 비워 다른 사람을 얻고자하시는 주님을 기억해야합니다. 새끼나귀 타는 신앙을 부흥이라고 말합니다. 백마를 타기 원한다면 그것이 타락입니다.

바벨탑을 쌓아 자기들의 이름을 내는 것은 결국 흩어지는 결말을 볼뿐입니다(창11장). 낮은 자리에 서고 다른 사람들을 먼저 인정해주면 사람들이 곁에 모입니다. 그러나 서로 높다고 싸우고 서로 자기를 내세우면 그 교회, 그 직장, 그 가정은 결국 흩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를 올바르게 부흥시켜야 합니다. 지금 이 시대에 필요한 교회는 잘난 사람을 찾아다가 자리에 앉히는 교회가 아닙니다. 높은 벼슬에 있는 사람을 환영하는 교회가 부흥하는 교회가 아닙니다. 권세 있는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가 능력 있는 교회가 아닙니다. 진실로 이 시대에 필요한 교회는 자신을 비우기 위하여 눈물을 흘리며 주님을 채우기 위하여 고통을 거절하지 않고 종의 모습을 자기 몸에 채우려고 씨름하는 성도들이 많은 교회입니다.

본문 25,26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주를 위한 희생의 정신과 자신을 버리는 정신으로 온 천하를 얻는 영광된 교회를 만드는 부흥을 일으키십시다.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주님의 뒤를 따라 가십시다. 우리는 새벽에 교회로 발걸음을 내딛을 때 오늘도 예루살렘을 향해 오르는 예수의 모습처럼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높아지기 위한 것이 아닌 낮아지기 위한 것입니다. 이런 역설적 그리스도인이 오늘 이 시대에 필요한 사람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내세우기 위해 전쟁을 치를 때 낮은 자리에서 주의 인격과 신앙을 닮아가고자 기도하는 사람이 참된 부흥을 일으키는 자격을 갖춘 자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바벨로 가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음을 놓치지 마십시오.